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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욱래 Jun 10. 2024

3. 산속의 다방

장편 현장소설 《카페 가는 길》

3. 산속의 다방



  이 나이에 내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지금 무엇이 되어 있어야 했을까? 국회의원? 장관? 아니면 군대에 있다가 장군? 고위공직자? 장발장처럼 시장? ……나는 어리석게 살아온 것은 아닌가? 학교 다닐 때 나는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그때 나는 원기가 과도했다. 그래서 이 꼴이 된 것일까?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아왔던가. 

  물론 내가 열심히 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인생을 그렇게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었다. 서른 살 적부터 근 15 년. 한 가지 일을 열심히 하면서 살다 보니 추억 하나 만들지 못하고 세월만 휙 지나가 문득 나이 50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나는 열심히 살았던 것을 후회한다. 돈도 조금만큼도 남지 않았다. 

  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나는 경제문제가 너무나 힘들었다. 지방세는 매번 체납되어 승용차 번호판을 숱하게 떼어갔고, 겨울만 지나면 보일러를 켜는 심야 전기가 단전되었으며 무슨 무슨 요금이며 각종 공과금에 청구서들……. 나는 그저 가만히 있고 싶은데 제자리에서라도 계속 헤엄을 치지 않으면 빠져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내게 무엇이 남았던가. 그랬다. 그래도 내 마술(馬術)의 기량이 이 소도시에서는 제일 높은 것은 사실이나 50이 넘은 나이에 여자들 레깅스 같은 쫄쫄이바지나 입고 목소리는 가느다랗게 해서 

   “회원님. 더 앉아야 해요. 그렇죠. 발끝! 발끝! 좋아요.”

  계속 이러면서 살기도 난감했다. 그 일은 나이 많은 여자들이 좋다고 할 이십 대 코치들에게나 넘겨주는 것이 옳을듯했다. 그렇다. 다른 아무 일이나 하면서 살아도 글만 쓰면 되는 것이다.



  

  예전에 계속 글을 쓸 때, 몸이 처져서 서재에서는 작업이 잘 안 될 때가 있었다.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근방에 한때 이 나라에서 가장 점포 수가 많았고 약간 비웃듯 일명 ‘별 다방(브랜드 로고에 별이 들어가 있다.)’이라 불리는 ‘에이허브(Ahab) 커피’에 상대되어 ‘콩 다방’이 된 ‘카페 빈(cafe bean)’이 있었는데, 그럴 때는 따듯한 카페라테 한 잔 사서 그 매장 이 층에 앉아 노트북 작업을 하고는 했었다. 한동안 쓰다 보면 반쯤 남은 그 음료는 다 식었는데 거의 그것을 남기고 나왔던 것 같다.

  군 입대 전 한 시절 서울 생활을 할 때 두서너 곳의 커피숍을 다녀 본 적이 있다. 그중 두 군데는 2 층에 있었는데 내가 더 마음에 들었던 데는 미국 옛 서부의 분위기로 꾸며 놓았었다.(이 글을 쓰고 있자니 마음이 편안해졌던 그 커피숍의 어둑한 분위기가 그립다. 이제는 어디서든 한 번만이라도 그 분위기를 느껴볼 수 없게 되었다. 내가 그 청춘시대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그 커피숍들은 모두 자리들 사이에 칸막이가 있었고 한구석에 뮤직박스도 있었던 구조가 떠오른다. 그 시절도 커피값이 상당했을 텐데 항시 가난했던 젊은 날의 나는 무슨 여윳돈으로 그런 곳에서 혼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던가. 심적 여유? 여행자 같은 낭만? 이 정도는 누려도 된다는 자기 위무?

  지갑에 여유가 생기게 된 서른 살 초반에는 차를 몰고 지나가며 바닷가 돌무지 위에 외로이 자리한, 돈깨나 있는 사람들이 그 근방으로 여행차 왔다가 들러서 한때를 보낼 것 같은 하얗고 신비롭게 서 있는, 미국 건축 양식을 흉내 낸 듯한 건물의 커피숍을 몇 개 본 적이 있었다. 한 번쯤 들어가 넓은 창가에 앉아 바로 밖에서 부서지는 파도의 흰 포말을 보고 있었으면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세월이 많이 지났어도 역시 커피값이 만만치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때도 나는 돈이 충분치 않았었던 것 같다. 나에게 카페나 커피숍에 관한 기억은 그런 것들이다. 카페라는 문화를 나는 거의 몰랐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은 카페가 넘쳐나는 카페 공화국이다. 아무리 그래도 하필 내가 산속에서 다방이나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선다 하나 그 말은 실제 인생과는 다르다. 인생에서는 한 번 넘어지면 대부분 다시 일어나기 힘든 노릇이다. 

  한국 사회에서 그런 업종을 요즘은 대체로 ‘카페’라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카페’는 예전에 흔했던 ‘커피전문점’ 혹은 ‘커피숍’과는 다른 것일까? 그리고 ‘커피전문점’이나 ‘커피숍’과 ‘다방’혹은 ‘찻집’은 별개의 것일까? 그 문제가 가끔 골치를 썩였다. 

  한국 나이로 나는 이미 51 세. 다방 하나 차리려고 그 길고 궂은 세월을 헤쳐왔던가. 그것도 이 같은 시골구석의 산속에다 말이다. 이제는 옛날이 되었지만 내 사업장을 할 때, 이런 시골 산속에 그것이 옮겨와 있는 악몽을 꾸다가 식은땀으로 푹 젖어 깬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런데 이제 실제가 된 것이었다. 나는 이미 망한 터였다. 

  이제 와 시골 산속에 다방 하나 만들어놓고 커피나 파는 것이 굳이 내 존재의 목적인 것일까? 그렇다. 무슨 일을 해서라도 돈은 벌어야 하지만 왜 굳이 다방이어야 하나.

  어언 십오 년간 같은 일을 너무 오래 해서 재미로, 또는 부업 삼아 밤으로는 술집을 하나 해볼까 생각해 본 적은 있었다. ‘나이트(knight)’라는 이름의 그 선술집의 어둑한 내벽에는 검이며 방패, 투구로 장식하고 나는 주인 겸 요리사로서 자기도 기사(士) 같은 기분을 내 보는 술손님들을 상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술김에 행패나 주정을 부릴 수 없다. 나는 진짜 기사에 근접하기 때문이다. 

  15 년 만에 그 일을 접은 다음에는 계속 어려워져서 청국장집을 해볼까, 밤 장사인 양념 돼지껍질 볶음 전문 실내 포장마차 같은 것을 해볼까 따져본 적도 있었다. 내 청국장은 돼지고기와 깍두기를 넣는 조리법인데, 한 끼 잘 먹었다고 하기에는 왠지 부족하고 맹숭맹숭한 일반 청국장찌개와는 달리 맛 자체가 월등하고 속이 꽉 차는 느낌이다. 그러나 시중에 파는 청국장은 쓰기 싫은데 어떻게 장을 띄울 것이며, 김치며 같이 먹기 맞는 간장 고추 장아찌 같은 기본 반찬을 내가 만들 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그렇게 어려운 것은 생각 중에서 뺐다. 대신 양념 돼지껍질 볶음은 나만의 조리법 있고 십수 차례 조리에서 한 번도 성공하지 않은 적이 없어 내가 하든가, 아니면 주위에 형편 어려워진 사람들에게 내가 ‘레시피’를 알려줄 테니 해보라고 몇 번 권한 적은 있었다. 그 안주의 주재료인 냉동 돼지껍질의 원가가 워낙 싼 데다가 내 조리법대로 하는 그 가게가 잘 되는 것을 보는 보람도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런 ‘나이트’나 실내 포장마차를 하기는 끝내 내키지 않았다. 나는 밤늦게까지 매이는 장사는 질색이었고, 또 그러한 업종은 자주 원치 않을 때도 술을 마셔야 할 성싶었다. 아무튼, 나는 그런 요식업들의 계획은 포기했었다.    




  업종의 명칭이야 다방이든 커피숍이든 카페든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이 이야기의 제목을 《카페 가는 길》로 하였으니 카페로 해 두기로 하자. 우선 나는, 이 이야기를 충분히 자고 일어나서 쓰는 것이다. 몸이 피로해서는 나는 도무지 글을 쓸 수가 없다. 새로운 생각을 해내기는커녕 생각하기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한 해 전 어떤 날 모친이 말했다.

  “너도 나이 오십이나 먹었는데 이제부터라도 벌어 먹고살 방도가 있어야 하지 않겠냐?”

  그래서 시작된 것이었다. 

  시내를 벗어나 차로 10 분 정도 거리에 모친이 오래 다니는 사찰이 있고 승려는 두 명이다. 그 사찰에서 작게나마 ‘추모원’, 그러니까 봉안당을 같이 하려고 아래쪽의 터를 정리하고 휴게실 겸해서 맞배지붕을 인, 정면 삼 칸 측면 이 칸의 한옥 건물을 지어놓았던 것이었다. 막상 주위를 둘러서 봉안단 공사를 하려는데 그즈음 여기 지방자치단체가 삼림 훼손을 막자는 것인지 묘를 못 쓰게끔 하려고 대규모 시설을 조성해서 염가로 후려치기 시작하는 와중이었다. 결국, 워낙 채산성이 떨어지게 된 지라 기약 없이 중단해 놓은 상태였다. 이제 덩그러니 서 있는 한옥 건물을 활용할 방도도 없을뿐더러 두 승려 다 연로해 그 건물을 쓰기 원한다면 거저 사용하는 대신 사찰 전체 경내를 이모저모 관리해 줄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언뜻 불목하니를 떠올렸으나, 머리를 다 밀고 승복을 입어야 한다고 하더라도 진짜 승려가 되지 않고 소설만 쓸 수 있다면 나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그런데 승려로서는 왜 소설을 못 쓸 것인가? 쓸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네들의 글은 잘해도 부처의 가르침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소설가로서의 광대한 자유가 없는 것이다. 승려가 불교의 가치관 말고 다른 것도 쓸 수 있지 않으냐고? 그럼 그는 이미 승려가 아니다. 내 문학은 제한 없는 정신 작업을 담보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튼, 나는 그 현장에서 며칠 주변 정리를 하던 중에 무엇 때문에 둘 중 큰스님과 뜻이 안 맞아 언쟁하다가 그냥 나와버렸었다.    




  몇 년째 써 오고 있는 그 소설을 써가려면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했고, 가을에 인력사무소의 승합차 기사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대개 음식점에서 일할 여자들을 아침에 태워다 주고 밤에 다시 태워서 개개의 집 앞까지 퇴근시켜 주는 일이었는데, 하루에 출퇴근을 두 번씩 해야 했으나 빈 시간이 확보되어 나는 전술했던 소설 작업을 해나갈 수가 있었다. 소설을 쓰면서 날과 달들이 갔는데 어느덧 한겨울이었다. 다시 밤이 되어 불 꺼진 그 인력사무소에서 차 키를 챙겨 나와 운행을 하던 차였다. 성격이 못되어 먹은 여자들도 많다는 것을 미처 몰랐었다. 그런 여자들은 배우고 못 배우고의 차이가 아닌 듯하다. 그런데 배운 여자들은 조금이라도 생각을 해 본 다음 행동하려나?

  그 여자를 태울 시각이 십여 분 남았었다. 목이 말라 그 식당 근방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한 병 사서 차에 올랐을 때였다. 아차! 휴대전화기를 차에 두고 내렸던 것이었다. 같은 전화번호가 두 번 찍혀 있었다. 나는 얼른 그 번호로 전화를 하며 그 식당 앞에 차를 대었다. 그 여자는 조금 일찍 끝난 것이었다. 그 여자는 쌀쌀맞게 차에 탔다.

  “왜 전화를 안 받아요? 몇 번이나 했는데?”

  갓 서른이 넘은 것 같은 새파란 여자였다.

  “아이고! 미안해요. 핸드폰을 깜빡 차에 놓고 잠깐 음료수를 한 병 사 오느라고.”

  “아, 시끄럽고 빨리 가기나 해요.”

  이 무슨? 이렇게 못 배워 처먹은 계집애가 있나? 살림이 어려워서 나와서 돈 벌려고 궂은일 하는 여자들, 못 살아서 먼 한국에 와서 밑바닥 일을 하는 외국 여자들이 안 되어 보여서 웬만하면 잘 대해주려 노력했었다. 그런데 아무리 제 사정이 그렇다고 해도, 내가 결혼을 좀 일찍 했다면 애비뻘인데 이렇게 막 나가다니. 아무래도 어이가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택시 기사냐? ……네가 시키는 대로는 못 하겠다.”

  “뭐라고요? 기가 막혀서. 사무실에 전화할 거예요.”

  정말 못되어 처먹은 여자였다. 나는 차를 출발시키지 않았다.

  “전화해라, 해. 그리고 너 같은 애는 안 태워.”

  어쩌나 룸미러로 보니 한참을 내 뒤통수를 쏘아보던 그 못되어 먹은 여자애는 결국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내 참 더러워서. 일을 때려치우더라도 저런 것들은 안 태운다. 아니, 어떻게 저렇게 생겨 먹었을까. 

  다음날 사무소를 갔더니 역시 그 여자는 전화로 따졌다고 한다.

  “기사님. 아무리 그래도 그 여자들 때문에 우리가 먹고사는데…….”

  일을 시작할 때부터 내가 내는 분위기가 달랐던 것인지 큰 소리를 못 내면서 현장 십장처럼 생긴 늙수그레한 여자 실장이 부탁 조로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난 그런 애 못 태워요. 안 태워요. 앞으론 실장님이 태우든지 하세요. 실장님도 코스 돌잖아?”

  알고 보니 고등학교 후배인 소장의 사촌 누나라는 대리가 있었다. 무슨 건으로 그녀에게 이의를 제기했다가 바로 나가지 않고 화장실에 앉아 있던 때였다. 사무소 안에 기다리던 사람들이 많아 아마도 내가 그냥 나간 줄로 알았던 것 같다.

  “일도 제대로 못 하면서 따지긴 뭘 따져?” 

  그 여자가 실장에겐가 지껄이는 소리였다. 나는 물을 내리고 화장실에서 나오면서 일부러 곧바로 따졌다.

  “아니 왜 사람 돌아서자마자 뒤통수에 대고 험담을 해요?”

  언제 자기가 그랬냐고 낯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그 여자가 항변했다.

  “그러는 거 아냐. 앞에만 없으면 남 욕하지? 어디 무서워서 살겠어? 너도 제 일도 똑바로 못해서 툭하면 다른 사람 허탕 치게 만들면서 말이야. 그렇게 살지 마.”

  이런 일은 언제든 때려치우면 된다. 없는 것들끼리 더 업신여기는 것이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지만 이런 일을 하는 것들은 저희 스스로 비천한 일로 만드는 것이다.

  아무튼, 그때껏 몇 종류의 아르바이트 동안 내가 일하는 방식은 이러했다.




  이듬해 봄. 고등학교 후배가 되는 소장은 사무소 사정이 어려워져서 그런다지만 상술한 이유들의 후과였던지 나는 잘렸다. 그러다가 그런 일로는 더는 사람 꼴이 안 될 것 같아 알아보니 그 사찰은 아직 마땅한 사람을 구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큰스님을 찾아가야 했다.

  예전에 그만두고 그토록 싫어했던 업주를 또다시 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이 카페 공화국의 산골 카페라니……. 

  다른 사업들을 할 때 내가 망할 줄 몰랐었다. 그런데 이 산속에서 카페를 만들기 시작하기 전부터 우선 나는 망할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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