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현장소설 《카페 가는 길》
나는 종교가 없었다. 그러니까 나 자신 이외는 의지하지 않고 살았었다. 하지만 마흔이 채 못 되어 내 사업은 내리막길만 탔고 지금 이렇게까지 되었던 것이다. 노력이든 능력이든 인력으로는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인간은 자연스레 신앙심이 생기는 모양이다. 그때 나는 약사여래에 대해 알게 되었다.
불교의 세계관에서는 석가모니 외에도 부처가 여럿이다. 그들 중 약사여래*는 약왕(藥王)이라는 이름의 보살로 수행할 때 열두 가지의 큰 원(願)을 세웠다고 한다. 그중에는 이런 항목들도 있다.
· 중생으로 하여금 욕망에 만족하여 결핍하지 않게 하려는 원.
· 일체의 불구자로 하여금 모든 기관을 완전하게 하려는 원.
· 나쁜 왕이나 강도 등의 고난으로부터 일체중생을 구제하려는 원.
· 일체중생의 기갈을 면하게 하고 배부르게 하려는 원.
· 가난하여 의복이 없는 이에게 훌륭한 옷을 갖게 하려는 원.
나에게는 경제적 곤궁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질병을 낫게 하고, 온갖 재난으로부터 보호하는 등 한량없는 중생의 고통을 없애준다는 바로 이러한 부처만이 필요했다. 나는 황동 주물의 조그만 약사여래 상을 구해 내 사업장 집무실의 서가 한 칸에 얹어두고 가끔가다 시선을 주며 속으로 그 명호를 외웠다.
내가 애초에 말을 탈 때는 제일 즐거운 곳이었는데 이제는 가장 고단한, 괴로운 곳이 된 승마장. 희망 없는 나날. 현실이 힘들면 옛 추억이라도 떠올려야 하는데―곱씹으면 잠시일지언정 단맛을 머금게 하는 추억이 있다―그럴 겨를도 없는 이른 안갯속의 노동하러 가는 길. 온종일 일하며 살면서는, 완성된다면 두 권 분량인 소설을 이어 써 갈 가망이 없었다. 노동 시간이 짧고, 되든지 말든지 별로 관계없다는 마음으로 그 일 자체와 거리가 있어야 글을 쓸 수 있는 것이다. 해 떨어질 때 돌아와 애써 책장을 펴 보아도 문장 하나씩도 도무지 해독되지를 않았다. 몸이 피곤하면 머리까지 전연 기능을 하지 못하는 듯했다. 누가 나더러 인적 없는 곳에 들어가 지키고만 있어도 한 달에 100만 원씩만 준다고 하면 그 돈을 집에 보내고 글을 쓸 수 있으련만…….
승마장은 일주일에 하루씩만 쉬었다. 쉬는 날은 차를 가지고 먼 데까지 다녀오거나 역에서 먼저 들어오는 아무 기차나 타고 앉아 있기도 했다. 피곤하다고 집에 있어 보아야 종일 누워있다가 낮잠이나 자고 난 다음의 허무한 저녁, 그러니까 다음날 새벽같이 일 나가야 할 그런 처지에 놓일 뿐이었다. 언제는 영주에서 기차를 내려 부석사나 한번 들러보려고 시내버스를 탔다. 작은 시가지를 벗어나서 얼마쯤 되었는데 수풀 속에 촌락들이 드문드문 지나갔다. 얼마 뒤면 스러질 듯한 썩은 집들이 여태도 남아 있었다. 그렇게 불행은 도처에 깔려 있었다.
차를 몰고 보통 아주 멀리는 말고 너무 늦게 돌아오지 않을 거리의 문학관들을 찾아다녔다. 이 나라, 사회가 문학적 성취나 그 자료들에 별 관심이나 있다던가. 그러함에도 여러 지방자치단체는 자꾸 문학관들을 번듯번듯하게 세우고 있는 것이었다. 사람 없는―거의 나뿐인―그런 시설들에는 필히 공무원이거나 그런 지방자치단체의 직원들이 배치되어 적막하고 무료한 시간을 날이면 날마다 죽이면서 앉아 있다. 지방자치단체들이 아직 살아있는 유명 작가를 내걸고 만들어놓은 문학관들도 꽤 여럿이었는데, 그중 세 개의 지방자치단체는 각기 한 늙은 소설가의 문학관을 하나씩 세워놓았다. 그 소설가의 전시품목은 상당히 많았으나 세상을 떠난 작가들의 문학관 대개는 생전에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탓인지 값나가는 유품이 없었고 다른 소품들도 몇 개 되지가 않았다.
내 저작은 달랑 두 권뿐이어서 내가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여기 지방자치단체가 내 생전에 내 문학관을 세우게끔 하려면 일단 더 써야 했다. 문학이나 사상은 그 저자가 태어나 자란 지역과 관계가 깊다고 했다. 특히 나는 이 소도시 이곳저곳에 담긴 이야기들을 풀어낼 터라 다른 곳의 문학관들 정도는, 아니 그 이상의 타당한 의미와 가치가 있을 것이었다. 내 문학관에는 비록 비싸지 않은 것들이라 해도 내 문학의 흔적을 다양하게 전시해 놓고 싶었다. 나중에 여기 소도시는 내 이름을 건 문학기행도 유치할 수 있는 터였다. 하지만 일주일에 엿새씩 꼬박꼬박 해야 하는 일로는 내 창작은 요원했다. 반드시 나는 소설을 이어가야만 했다. 그것이 내 일생의 목적이었다.
“아니, 마방 열두 개를 무슨 수로 아홉 시까지 다 치웁니까?”
“그럼 일곱 시에 나오면 되잖아.”
내가 소리쳤다.
“내가 노옙니까?”
며칠 뒤 나는 그 열악한 승마장을 때려치웠다.
* 약사유리광여래(藥師瑠璃光如來) 또는 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