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박하지만 근사하게.
작년에 함께 일했던 학년부장님은 "근사하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쓰셨다.
"그것 참 근사한데요~?"
"**샘 덕분에 기획안이 근사해졌네~"
대박, 쩐다 등의 표현만 주야장천 듣다가 모처럼 이런 어휘를 들으니 귀가 간질간질해진다.
부장님은 근사하다는 표현에 걸맞은 분이셨다. 매사에 솔선수범하셨고 유쾌하셨으며 그러면서도 아랫사람에게 격을 갖추셨다.
1년 동안 학년계를 맡아 부장님과 함께 일을 하며 어려운 줄 모르고 열심히 했고, 많이 배웠다.
그리고 종업식 무렵이 가까워질 즈음에 부장님처럼 ”근사한 어른”이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편지로 써서 드렸다.
근사(近似)하다: 그럴듯하게 괜찮다.
*유의어: 멋있다. 괜찮다. 좋다. 같다. 가깝다. 비슷하다 등
그럴듯하게 괜찮기 위해서는 대상과 최대한 가깝거나 비슷해야만 한다. 괜찮음을 표현하기 위해 수많은 단어들을 고르고 골랐을 텐데 그 와중에 고른 단어가 '근사하다'라니.
근사하다는 말 그대로 근사하다. 입 밖으로 단어를 내뱉는 순간 그것이 가지고 있는 사전적 의미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사소한 것이 사소한 것이 아니게끔 만드는 힘.
'근사하다'는 듣는 순간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힘이 있다.
조리원을 나와 한달 동안 남편과 함께 집에서 아이를 돌보다가 남편의 개학날이 다가와 산후조리도우미를 신청했다.
2-3주 동안 집안일과 아이를 맡겨야 되는데, 살림 방식이나 육아관 등이 다르다 보니 결정하는 것이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카페에서 글을 뒤져봐도 추천의 글보다 '잘 안 맞아 고민이다', '취소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 등의 글들이 더 눈에 띄었고, 신청을 하기 전부터 내 마음은 싱숭생숭해졌다.
몇 날 며칠을 고민만 하다가 부랴부랴 신청을 한 후 오신 도우미 선생님은 연세가 있으셨다. 인자하신 말투와 부드러움, 새로운 것에 대한 수용력까지. 나의 걱정은 기우였음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청소는 물론이거니와 해주신 반찬들도 맛있었으며 무엇보다 아이에게 진심이셨다.
물 흐르듯 흘러가는 2주였다.
선생님 덕분에 나는 행복하고 든든한 조리 생활을 마칠 수 있었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2주 동안 산후조리를 하며 선생님께서 해주신 다양한 반찬들을 먹었지만, 개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다래순'이다.
다래순은 다래나무의 어린순으로 보통 나물요리로 많이 쓰인다. 끓는 물에 데쳐서 발에 올려놓아 따가운 봄 햇살에 말린 후, 나물로 무쳐 먹는다고 한다. 간이 센 양념이 필요하지도 않다. 그저 들기름만 있으면 담백하고 고소한 다래순 나물볶음 완성이다.
선생님께서는 내가 나물 요리를 잘 먹는 것을 유심히 보시곤 집에서 직접 다래순 나물볶음을 만들어 가지고 오셨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런 거 잘 안 먹는데 나물 반찬을 너무 잘 먹어서 만들어봤다며,
생긴 것은 이래도 맛있다며,
혹시 입에 안 맞으면 나중에 비빔밥으로 비벼 먹으라는 말까지.
멋쩍은 웃음과 함께 주섬주섬 반찬통을 꺼내시는데, 모양새가 낯익어 어디서 봤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정월대보름에 먹는 묵나물이었다.
제철 생나물과는 또 다른 맛이 나는 다래순 나물볶음의 맛은 한마디로 '근사'했다. 소박한 나물볶음이라 할 수 있지만 귀하디 귀한 맛이었다.
아마도 나물볶음 안에 들어간 선생님의 마음씀씀이가 한몫하지 않았을까.
도우미 선생님과의 약 2주간의 동고동락 후, 이번주부터는 혼자서 육아를 해야 한다.
잘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과 불안으로 온 신경이 집중된 가운데, 선생님께서 만들어 주신 다래순 나물볶음으로 아침 주먹밥을 만들어 먹었다. 다래순과 곁들여 먹을 수 있도록 베이컨도 함께 썰어 넣었다. 짭조름한 베이컨의 감칠맛이 주먹밥에 더해져서 식욕이 돈다.
이것을 먹으면 선생님의 응원 버프로 힘이 좀 나지 않을까, 혼자 시작하는 육아 첫날이 근사해지지 않을까 싶어 만들어본 것이다.
다래순과 베이컨을 밥과 함께 섞으며 생각을 고루 정리하고 들뜬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오늘 하루는 근사할 것이다.
근사한 어른이 만드신 근사한 요리를 먹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