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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마음 근육과 토마토 주스

by 채움



#1.

부모님과 함께 살던 시절에는 제철 과일이 넘쳐났다.

봄에는 딸기, 여름에는 수박, 가을에는 사과와 배, 겨울에는 귤.

과일 바구니는 늘 무거웠고, 저녁에는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과일을 먹으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나니 사정이 달라졌다.

퇴근 후에는 먹고살아야겠다는 생존본능보다 귀차니즘이 삶을 잠식해 냉장고에 손이 가질 않았다.

게다가 2인 가구에게는 과일 바구니째 파는 과일의 양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집에 붙어있을 때 과일 좀 많이 먹는 건데..)


어쩌다 큰맘 먹고 사온 과일도 며칠 지나면 한쪽 귀퉁이가 물러 있거나, 냉장고 속에서 조용히 화석으로 발견되는 일이 태반이었다. 그러다 보니 마트 진열대 위에 있는 과일에 선뜻 손이 가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부모님이 과일이라도 한 박스씩 보내주시는 날엔, 둘 뿐인 식구가 머리를 맞대고 '과일 처리 회의'를 소집하곤 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살아남은 과일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토마토다.




#2.

토마토와 블루베리를 섞어서 만든 아침 주스



토마토는 여름이면 자주 등장하는 우리 집 아침 단골손님이다.

생으로 먹거나 설탕을 뿌려 먹기도 하지만, 역시 토마토는 주스가 되었을 때 위용이 드러난다.

꿀과 얼음, 물을 더해 갈아 마시는데, 요즘은 여기에 복숭아나 자두 등을 추가하여 한껏 여름을 담는다.

한 모금 들이키면 더위가 가시는, 무더운 여름을 깨우는 우리 집 비밀병기이다.


토마토에는 라이코펜 성분이 함유되어 있어 항산화 효과가 있다. 또한 고혈압을 예방하고 항균 작용을 한다고 한다. 피부 노화 방지에도, 다이어트에도 효과가 있다고 하는데 이쯤 되면 토마토는 채소계의 어벤저스가 아닐까.


하지만 내가 토마토를 좋아하는 진짜 이유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붉은색' 때문이다.

푸른 자연 속에 뜨겁게 떠오르는 태양처럼, 토마토의 붉음은 여름의 생기, 건강, 사랑을 닮았다.

그래서인지 토마토가 박스째 들어오는 날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주스를 갈아 마신다.


- 전날의 사투로 몸이 무거운 아침
- 파이팅이 넘치는 하루를 시작하고 싶은 아침(+1의 생기를 더하고 싶을 때)
- 위안과 사랑이 특별히 '더' 필요한 아침


특히, 마지막 경우는 토마토 주스를 갈 때 조금 더 신경을 쓰는 편이다.




#3.

조리원에 있을 때 남편이 만들어다 준 토마토주스 덕분에 힘이 났다.



맡은 업무가 제대로 안 풀리거나,

내가 생각했던 대로 수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경우,

혹은 남편과의 냉전 상태로 관계 개선이 시급한 경우일 수도 있다. (마지막은 비상사태로 봐도 무방하다)


아무리 괜찮은 척해도 전날부터 죽상을 하고 얼굴에 '나 건드리지 마시오'가 쓰여 있기 때문에 말투나 행동 하나에도 눈치가 보인다. 그럴 땐 어김없이 토마토를 꺼내 든다.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갑게 갈린 토마토 주스를 단숨에 들이키며 "오늘은 좀 괜찮아졌으면" 하는 마음을 대신 전해본다.

사랑하는 사람이 조금 더 건강하길 바라는 마음,

묵혔던 걱정과 짜증이 한꺼번에 내려갔으면 하는 마음이 붉은 주스 한 잔에 섞인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 더 단단해진 마음 근육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무더운 여름, 토마토는 어느새 우리 집의 작지만 귀한 보물이 되었다.


건강함, 생기로움, 자연 그 자체, 사랑 등 '붉은 끼'가 주는 토마토의 이미지 덕분일까.

시원한 토마토 주스가 아침 메뉴로 나오는 날이면 늘 그랬든 서로의 안위를 묻고, 마음을 살핀다.


"오늘도 잘 이겨내 보자."

붉디붉은 한 잔의 토마토 주스로 마음을 툭, 두드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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