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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근사한 다래순 주먹밥

: 소박하지만 근사하게.

by 채움



작년에 함께 일했던 학년부장님은 "근사하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쓰셨다.


-그것 참 근사한데요~?

-샘 덕분에 기획안이 근사해졌네~


'대박', '쩐다' 같은 말을 주야장천 듣다가 모처럼 이런 어휘를 들으니 귀가 간질간질해진다.

그 말투와 단어의 조합이 생경하게 느껴져 더 근사하게 들렸다.


부장님은 표현만큼이나 근사한 분이셨다.

매사에 솔선수범하셨고, 아랫사람에게 격을 갖춰 대하셨다.

큰소리를 내지 않아도 주변이 자연스레 따르게 되는 품이 있었고, 유쾌함으로 분위기를 편하게 만드실 줄 아는 분이었다.

1년 동안 학년계를 맡아 함께 일하며 어려운 줄 모르고 열심히 할 수 있었던 것은, 부장님의 영향이 컸다.

그리고 종업식 무렵, 나는 '근사한 어른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편지에 담아 부장님께 전했다.


근사(近似)하다: 그럴듯하게 괜찮다.
*유의어: 멋있다. 괜찮다. 좋다. 같다. 가깝다. 비슷하다 등

근사하다는 '멋지다', '괜찮다'와는 조금 다른 결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는 상대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그것을 향해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닮고 싶은 마음이 숨어 있다.


근사하다는 말 그대로 근사하다.

입 밖으로 단어를 내뱉는 순간 그것이 가지고 있는 사전적 의미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괜찮음, 좋음을 표현하기 위한 수많은 단어 중 근사하다라니. 듣는 사람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사소함'이 더 이상 사소하지 않게 되는 힘.

그것이 '근사하다'는 말이 가진 울림이다.






#1.

조리원을 나와 한달간 남편과 함께 아이를 돌보다가, 남편의 개학이 다가오면서 산후조리도우미를 신청하게 되었다. 2-3주간 집안일과 육아를 맡겨야 하니 살림 방식이나 육아관이 다르면 어쩌나 걱정이 앞섰다.

육아 카페에서 후기를 뒤져봐도 추천보다는 '잘 안 맞아 고민이다', '취소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 등의 글들이 더 눈에 띄었다. 신청을 하기 전부터 내 마음은 싱숭생숭했다.


몇 날 며칠을 고민만 하다가 부랴부랴 신청한 후, 조심스레 문을 열고 맞이한 도우미 선생님은 연세가 조금 있으셨고, 그만큼의 묵직한 인품이 느껴지는 분이었다.


매번 집에 오실때면 "아기 깼나요? 엄마는, 잘 잤어요?"를 물어보시며 현관에 신발을 가지런히 놓고 오셨다.

청소며 요리도 빈틈이 없었고, 아이를 안고 토닥이는 손길에는 단단한 연륜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선생님께서는 내가 사용하는 육아용품이나 새로운 육아 정보와 관련해서 궁금한 점이 있으면 스스럼없이 물어보셨다. "어머, 이런건 처음 보네, 신기하네요. 요즘은 이렇게도 하나봐요?"

선생님은 자신의 방식만을 고집하지 않고, 내가 하고 있는 방식에 귀를 기울이셨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데 있어서 겁내지 않으시고, 익숙지 않은 것들 앞에서도 마음을 닫지 않는 선생님의 유연함이 참 근사해 보였다.


물 흐르듯 흘러가는 2주였다.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따뜻한, '근사한 어른' 이셨다.

선생님 덕분에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조리 생활을 마칠 수 있었고,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2.

2주 동안 선생님께서 해주신 다양한 반찬들을 먹었지만, 유독 기억에 남는 것은 '다래순' 나물볶음이었다.


다래순은 다래나무의 어린순이다.

끓는 물에 데쳐서 발에 올려놓아 따가운 봄 햇살에 말린 후, 보통 나물로 무쳐 먹는다고 한다.

간이 센 양념도 필요하지도 않다.

그저 들기름만 있으면 담백하고 고소한 다래순 나물볶음이 완성된다.

세련되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시간과 정성이 묵직하게 담겨있는 요리다.





나는 나물 반찬을 곧잘 먹었고, 선생님께서는 그걸 유심히 보셨던 것 같다.

어느 날, 집에서 직접 무쳐 오신 다래순 나물을 건네며 말씀하셨다.


-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런 거 잘 안 먹는데, 저번에 보니까 너무 잘 먹어서 한번 만들어봤어요.

생긴 것은 이래도 맛있어요. 혹시 입에 안 맞으면 나중에 비빔밥으로 비벼 먹어도 되고~


멋쩍게 웃으시며 주섬주섬 꺼내신 반찬통 안에는 정월 대보름에 먹는 묵나물처럼 낯익은 모습의 나물이 들어 있었다.

제철 생나물과는 또 다른 맛이 나는 다래순 나물볶음의 맛은 선생님 만큼이나 '근사'했다.

소박한 나물볶음이지만, 선생님의 정성과 마음이 듬뿍 담겨 귀한 음식이었다.




#3.

도우미 선생님과의 약 2주간의 동고동락 후, 이번주부터는 혼자서 육아를 해야 한다.

불안하고 긴장되는 아침.

잘할 수 있을까? 온갖 걱정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온 신경이 집중된 날.


아이가 깨기 전, 냉장고에서 선생님이 남기고 가신 다래순 나물볶음으로 주먹밥을 만들기 시작했다.

짭조름한 베이컨도 잘게 썰어 함께 넣었더니 감칠맛이 더해져 입맛이 돌았다.


다래순 주먹밥을 만들며 나는 생각을 고루 정리하고, 첫 육아의 시작 앞에 스스로를 다독였다.


오늘 하루는 근사할 것이다.

근사한 어른이 만들어주신 근사한 나물을 먹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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