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채움 Aug 13. 2024

#8. 백미 쾌속과 맛있는 인생

: 가끔은 뜸 들인 밥도 맛있어요.


"백미 쾌속. 쿠쿠가 맛있는 취사를 시작합니다."

바쁘고 정신없는 아침, 오늘도 나는 '백미 쾌속'의 버프를 받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내 인생도 백미 쾌속이었다면 어땠을까. 취사 버튼을 누르며 삶의 속도에 대해 생각해 본다.






#1.

학교에서 아이들과 상담을 하다 보면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혹은 20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된다. 친구 관계의 서툶, 시험의 압박감, 진로 선택의 어려움 등이 때때로 아이들의 발목을 잡았고, 이 불안하기 짝이 없는 시간들이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것이 그네들의 속마음이었다. 지금이야 열거한 내용들이 밤잠을 설칠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지만, 나 역시 아이들과 비슷한 상황들을 겪으며 무수히 많은 밤을 뜬눈으로 보냈기에 상담 과정에서 영혼 리스된 리액션을 선보일 수는 없었다.


나의 20대는 불안의 연속, 삽질로 인한 환장대잔치, 성실과 상실 어딘가 등의 표현으로 함축할 수 있을 것이다.

20대는 패기와 열정이 있으니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무엇이든지 가능할 것이라는 순수함과, 그 못지않게 나를 초라하게 만드는 현실이 공존했다. 나는 백미 쾌속을 누르면 20분 만에 따끈한 밥이 지어지는 쿠쿠 같은 인생을 원했다. 그래서 끊임없이 남들과 나를,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하며 나 자신을 채찍질했다. 백미 쾌속을 부르던 쿠쿠 밥솥의 밥이 늘 찰지고 맛있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의 20대는 보이지 않는 결과물을 위해 '최종_최최종_최최종(진짜)_최최종(진짜)(이게 진짜). txt'로 향하는 지옥의 기획안 같았다.


앞뒤 보지 않고 경주마처럼 달리던 20대의 삶이 마냥 가치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보기 좋았던 것도 아니었다. 초라함과 마주할 수 있는 용기는 나날이 부족했고 종국에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과물을 얻기 위해 빠른 속도만을 고집하느라 정작 무엇이 좋고 중요한지 생각할 틈이 없었고, 그저 시간이 빨리 흘러 30대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만 간절했다. 핸들이 고장 난 8톤 트럭처럼 흔들리는 20대의 눈에는 30대의 삶이 안정적이었고 전문적이었으며, 여유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2.

갓 지은 콩나물밥은 언제 먹어도 맛있다.



쿠쿠의 도움을 받아 인생도 쾌속으로 바뀌었으면 참 좋았으련만, 30대 중반이 된 나를 돌아보니 20대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어른인 척하는 어른이가 되어 아파트 시세와 자동차, 육아 정보 등 좋은 정보들을 찾기 위해 유령처럼 인터넷을 떠돌아다니고, 앞으로의 인생을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지 고민하고 불안해하는 모습은 똑같았다. 여기에 아이들에게 '복도 뛰어다니지 마라, 급식 먹을 만큼만 받아라, 칠판에 낙서하지 마라' 등 고요 속의 외침을 하는 것과 가끔은 교무실에서 아이들과 초코파이 하나를 두고 네가 먹을래 내가 먹을까라며 옥신각신하는 철딱서니 없는 모습까지 추가되었다.


다만 30대의 삶이 20대보다 0.5라도 더 낫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제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느 정도 눈에 보이고, 휘청거리는 인생일지라도 나의 바운더리 내에서 삶을 요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금 더 맛있는 인생을 살기 위해 백미 쾌속보다는 뜸 들이기에 집중하고 싶다. 아니면 옥수수든 감자든 버섯이든 밥 안에 같이 넣어 먹을 수 있는 무언가에 집중하거나. 그것이 내가 좋아하는 재료들이라면 더욱 좋겠지. 나만의 속도로 흘러가는 지금의 30대가 참 좋다. 좋아지기 시작한 것들이 눈에 보이고, 좋아하는 것들을 천천히 오래 눈에 담아두려고 한다.





삶을 사는 데 있어 백미 쾌속의 버프는 가끔씩만 받아야지:)



  











이전 07화 #7. 아침부터 삼겹살을 먹는다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