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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섭 Dec 05. 2024

가장 소중한 일상

아빠의 금주 (2)

 나는 떨리는 손으로 '응급중환자실'이 적힌 인터폰의 벨을 눌렀다. 중환자실 문이 열렸다. 비교적 가까운 곳에 아빠가 누워있었다. -1편 중에서

 하루 만에 수척해진 얼굴과 목에 감고 있는 C-collar (경추보호대) 때문에 아빠를 못 알아볼 뻔했다. 침대에 누워계시는 모습을 보니 순간 눈물이 나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밖에서 엄마와 누나들이 울고 있었다. 나까지 힘든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감정을 애써 눌렀다. 눈꺼풀이 단단해지며 눈이 작아졌다. 최대한 담담한 척 아빠에게 다가갔다.


"아빠 저 왔어요. 괜찮으세요?"


 아빠는 목에 감고 있는 보호대가 불편한지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똑바로 누운 상태로 하늘만 바라보며 이야기하셨다.


“태섭아, 다리에 감각이 없어. 다리를 못 들겠어. 아까 엄마랑, 누나들한테는 이야기 안 했어. 나 어떻게 되는 거 아니냐. 너무 무섭다."


 아빠의 무섭다는 말이 살면서 처음이었다. 그 단어가 한없이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언제나 당당하고, 든든한 분이셨기 때문이다. 감각이 없다는 양쪽 다리를 만져봤다. 발을 만졌다. 발가락을 만졌다. 살짝 들어보고, 꼬집어도 보고, 쓰다듬어도 봤다. "아빠 진짜 아무런 감각이 없어요?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요?"


 "그래 느낌이 없어. 배 아래쪽으로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 


 그때 간호사 한 분이 내 옆에 다가왔다. 그리고 간단하게 설명을 했다. 방금 응급실에서 올라오셨다. 경추가 다쳐서 신경이 눌린 것 같다. 지금 응급 수술을 기다리고 있다. 이제 곧 신경외과 과장님이 와서 자세한 설명 해주실 거다.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다. '경추신경손상' 분명 아까 전에 공부했던 내용 중에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뭐부터 질문을 할지, 뭐가 중요한 건지 몰랐다. 아직 나는 간호학생이고 이런 적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가만히 있자 간호사는 다른 환자를 보러 갔다. 아빠가 손을 들어 나를 불렀다. 떨리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태섭아. 엄마랑, 누나들 잘 부탁한다."


 내 눈이 다시 커졌다.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아니야 이러면 안 돼. 이런 모습 보이면 안 돼.' 다시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무슨 소리예요. 든든하게 우리 가족 지켜주시는 건 아빠였어요. 수술받고 돌아오실 때까지만 대신 지키고 있을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잘 받고 오실 거예요. 금방 나오실 거예요. 다시 괜찮아지실 거예요. 가족 생각하세요. 꼭 회복한다는 생각으로 수술 잘 받고 나오세요."      


 아빠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눈을 깜빡였다. 신경외과 과장님이 왔다. 인사를 나누고 설명을 듣기 위해 가족들 모두들 모니터 앞에 섰다. MRI 영상을 함께 봤다. "아버지는 현재 하반신 마비 상태입니다.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손가락으로 검은색 사진을 가리켰다. 이 부분이 눌렸기 때문에 다리로 가는 신경이 전달되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 응급 수술을 준비하고 있고, 이제 곧 들어간다고 했다. 우리는 고개를 숙이며 계속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처음에 겁을 주던 과장님도 이 분야 전문이니까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고 했다.


 다행히도 수술은 잘 끝났다. 아빠 다리에 감각이 돌아왔다. 하지만 이전처럼 바로 걸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신경이 제대로 돌아오려면 꾸준하게 재활을 거쳐야 한다고 했다.


 한 달이 지났다. 재활에 성공하는 건 쉽지 않았다.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처럼 뻣뻣했고, 휘청거리고, 넘어졌다. 대, 소변을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화장실조차 가지 못했다. 기저귀를 차고 침대에서 해결해야 했다. 아빠는 힘들어하셨다. 옆에서 돌보는 엄마도 너무 힘들어하셨다.


 그 사이 입대한 나는 첫 신병 휴가를 나왔다. 아무도 없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군복을 벗고 바로 병원으로 갔다. 병실에 있던 가족들을 보며 힘차게 인사를 했다. 군기가 바짝 들어 있었다. 아빠는 빡빡 깎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으셨다. 바람을 쐬기 위해 휠체어로 아빠를 잡고 옮겼다. 옥상 정원으로 나갔다. 시원한 바람을 맞았다. 산이 있는 풍경을 봤다. 그 순간 바람에 흘러가는 아빠의 말이 들렸다.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 


 4개월이 지났지만 재활에 큰 변화가 없었다. 아빠도 엄마도 많이 지쳐있었다. 바로 옆에 내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현실은 이틀 후 복귀였다. 군대가 너무 싫었다. 내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었다. 이 상황이 너무 힘들었다. 어떤 훈련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부대에 복귀하고 나서 전화를 자주 했다. 편지를 자주 썼다. "아빠 건강은 괜찮으세요?" 언제나 첫마디는 똑같았지만 하루하루 더 밝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6개월이 지나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제는 걸으실 수 있다고 했다. 병원도 집 근처 재활 병원으로 옮겼다고 했다. 두 번째 휴가를 나와서 집에 갔다. 약간 불편해 보이셨지만 분명히 걸었다. 아빠는 또다시 내 머리를 만지며 웃으셨다. 이전보다 더 활짝 웃으셨다.


 1년이 지났다. 아빠는 몇 달 전 퇴원했다. 통원 치료로 재활을 시작했다. 아침이면 집 앞에 있는 하천을 걸었다. 오후에는 재활 치료를 받으러 갔다. 병원이 문 닫는 주말에는 산으로 갔다. 평소 성실했던 성격처럼 열심히 하셨다. 넘어지더라도 걷고 또 걸었다. 정상에 70% 정도로 많이 좋아졌다. 이제 부대 복귀를 해도 안심이 되었다. 왜냐하면 가족들을 지켜주던 든든한 아빠가 다시 돌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1년 9개월 후 전역을 했다. 아빠는 다시 회사에 복귀하셨다. 나도 학교에 복학했다. 가족들에게 평범했던 것들이 다시 돌아왔다. 소중한 것들이 다시 돌아왔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이 평범한 일상이 가장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2015년 겨울, 친구 장례식장에 갔던 아빠는 슬픈 마음을 잊기 위해 술을 마셨다. 대리운전을 불러서 집에 잘 들어갔다. 물 한 잔 크게 마시고 바로 잠에 들었다. 새벽 1시 갑자기 소변이 마려웠다. 주변이 어두웠다. 침대 위에 잠깐 섰다. 불을 켜려고 스위치를 더듬거렸다. 한 발자국 앞으로 갔다. 그때 순간적으로 발을 헛디뎠다. 앞에 있는 벽으로 넘어졌다. 벽을 강하게 박으면서 목이 심하게 꺾였다. 순간 기억을 잃었다. 몇 분 후에 깨어났지만 다리에 감각이 없어졌다. 우리 가족의 소중한 일상도 함께 없어졌다.


 익숙할 때는 모른다. 하지만 잠깐이라도 사라지면 알게 된다. 일상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아빠는 이제 소중한 일상을 꾸준하게 지키고 있다. 평소 좋아하시던 술을 완전히 끊었다. 벌써 '술 없는 삶'을 살게 된 지 10년이 다되어간다.


 일상 속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겪는 일이다. 술 때문에 잃어버렸던 일상, 2020년 코로나 때문에 잃어버렸던 일상, 2024년 12월 3일 대통령의 비상계엄으로 잃어버릴 뻔했던 일상. 항상 없어지거나, 없어질 위험 앞에서 우리는 소중함을 깨닫는다.


여기에 일상을 지키기 위한 세 가지 방법이 있다.

1. 행복을 인식하는 것.

2. 사소한 것에도 감사하는 것.

3. 소중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가장 소중한 것들은 언제나 우리가 잊고 지내는 일상 속에 숨어 있다.



(금주 22일 차, 있어 보이게 하루하루 세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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