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금주 (1)
2015년 겨울, 나는 군입대를 앞두고 있었다. 3주 뒤면 훈련소가 있는 논산으로 가야 했다. 예고도 없이 우편으로 날아온 입영통지서가 자꾸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루에 딱 5%씩 미칠 것 같았다) 술을 왕창 먹고, 미친 듯이 놀고, 여행도 가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학교 도서관에 콕 박혀있었다. 왜냐하면 2학년 2학기 기말고사가 2주 남았기 때문이다. 나는 군대에 죽으러 가는 게 아니었다. 그 말은 2년 뒤 복학해도 내 성적은 남아 있다는 말이었다. 어쩔 수 없이 최선을 다했다. 다시 돌아왔을 때 내 성적을 보고 진짜 죽을 수는 없으니까.
새벽 1시, 학교 도서관은 겨울이 아니었다. 밖에는 분명 눈이 오는데, 안에는 무지하게 더웠다. 천장에 달려있는 히터 때문일까. 아직까지 도서관에 남아있던 50명의 열기 때문일까. 덕분에 내 머리는 얼지 않고 미친 듯이 잘 돌아갔다.
'군대에 가면 이제 도서관에서 공부도 못하겠지? 바로 앞 편의점에서 맛있는 것도 못 먹겠지? 그래 지금이 행복한 거야. 피하지 말고 즐기자. 뭐지? 눈물이 모래처럼 따갑네. 흙흙.'
휴대폰을 방해 금지 모드로 바꿨다. 그리고 책상 중간에 뒀다. 한 번씩 시계를 보는 용도로만 사용했다. 오늘 봐야 하는 기출문제집이 많았다. 기본간호학, 성인간호학, 기본간호학실습, 간호윤리, 상담간호, 간호과정, 병리학, 약리학..."이것도 드디어 다 봤다. 다음!" 쌓인 책들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내가 예상한 대로 진짜 미친 걸까. 마치 게임 퀘스트처럼 재밌게 느껴졌다. (좋게 미쳐서 다행이다) 집중을 하다 보니 안 그래도 나의 큰 눈이 더 커졌다. 옆에서 같이 공부하던 친구가 곧 책상에 떨어질 것 같다고 했다. "친구야 만약에 떨어지면 바깥 눈 하고 바꿔줘. 눈이라도 군대 말고 밖에 있고 싶어."
서서히 눈에 통증이 밀려왔다. 결국 충혈이 됐다. 인공 눈물을 넣었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조금 쉬었다. 책상 중앙에 있던 휴대폰을 터치했다. 벌써 새벽 4시가 됐다. 그런데 시계 숫자 밑으로 알람이 떠 있었다.
'부재중 전화 7통, 엄마'
'부재중 전화 13통, 작은누나'
응? 새벽 4시에 왜 전화했지? 휴대폰을 챙겨서 조심스레 밖으로 나갔다. 부드득부드득 쌓여있는 눈을 밞으며 작은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 번의 통화음이 지나고 전화를 받았다.
"태섭아. 왜 전화가 안돼. 아빠가 크게 다쳤어. 지금 안동병원 중환자실이야. 지금 차 타고 얼른 와. 자세한 건 도착해서 말해줄게."
마치 길 옆에 쌓인 잘 안 녹는 눈처럼 내 몸이 순식간에 얼었다. 전화를 끊었는데 누나의 목소리만 귓속에서 맴돌았다. '아빠가 크게 다쳤어' 다시 도서관 내 자리로 돌아갔다. 패딩을 훔치듯 들고 나왔다. 주차되어 있는 차를 타고 '안동병원'으로 내비게이션 목적지를 찍었다. 늦은 시각이라 주변에 차가 거의 없었다. 상향등을 켜고 맹렬한 속도로 달렸다. 이미 머릿속에는 공부했던 내용들이 모두 사라졌다. 도로가 미끄럽다고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때 남아있는 생각은 오로지 하나였다.
'괜찮으실 거야.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안동병원에 도착했다. 비어있는 자리에 주차를 하고 작은 누나에게 다시 전화했다. 중환자실이 있는 3층으로 올라오라고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갔다. 굳게 닫혀있는 중환자실 문 밖에 엄마와 누나들이 서있었다. "엄마, 누나" 소리를 듣고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야.. 어떡해. 아빠가 술 먹고 화장실 가다 넘어져서 목을 다쳤대.. 영주에서는 못한다고 해서 안동으로 왔어. 우리는 면회 다 했어. 너 얼른 들어가 봐." 작은 누나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했다. 나는 엄마랑 누나들을 다시 한번 쳐다봤다. 모두가 입고 있던 옷자락으로 눈물을 훔쳤다. 큰일이 생긴 걸까. 중환자실이면 큰일은 맞을 텐데. 많이 심하신 걸까. 아니야 심하면 이미 수술했겠지. 괜찮으실 거야.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나는 떨리는 손으로 '응급중환자실'이 적힌 인터폰의 벨을 눌렀다.
"네. 김 xx 님 보호자입니다. 네 아들이요."
중환자실 문이 열렸다. 비교적 가까운 곳에 아빠가 누워있었다.
-> 다음화에서 계속
(금주 19일 차, 있어 보이게 하루하루 세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