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보통의 이브닝
1
나는 새벽 3시쯤 잠에 들었다. 다음 날 근무가 이브닝(오후) 출근이라 열심히 놀다가 잘 수 있었다. 밤은 즐겁지만 아침에는 항상 후회가 남는다. 얼마 안 잤다고 생각했는데 알람 소리가 시끄럽게 울어댔다. 실눈을 뜨고 반복 버튼을 눌렀다. 10분 뒤에 알람이 또 울렸다. 당연히 또 반복 버튼을 눌렀다. 최근 스마트폰 앱 글로벌 설문조사 결과 알람을 설정하는 사용자 중 약 65%가 알람이 울리면 즉시 일어나지 않고 한두 번 반복 버튼을 누르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이건 국룰이 아니라 글로벌 룰이다.
글로벌한 자기 합리화 덕분에 행복한 침대 생활 중이었다. 10분쯤 지난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조용했다. '응? 왜 조용하지?' 순간 느낌이 싸했다. 급하게 눈을 뜨고 시계를 봤다. "뭐야 30분이나 지났잖아!" 알람 목록에 들어가 보니 설정된 게 없었다. 반복 버튼이 아니라 삭제 버튼을 누른 거다. 출근까지 남은 시간은 20분. 타임어택이 시작됐다.
당장 이불을 발로 차고 나왔다. 후다닥 씻고, 머리를 말리고, 옷을 대충 걸쳤다. 튕겨 나가듯 밖으로 나왔다.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까지 뛰었다. 중간에 숨이 차서 10초 정도 걸었다. 폰으로 네이버 지도를 켰다. 버스 도착까지 2분 남았다. 다시 전속력으로 뛰었다.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괜찮다. 이제 정류장까지 열 발자국 남았다. 그 순간 버스가 눈앞에서 지나갔다. 정류장에서 타는 사람도 내리는 사람도 없었다. 그대로 슝 하고 지나갔다. 5분 죽기 살기로 뛰었지만 겨우 10초 때문에 놓쳤다. 아 스트레스.
결국 택시를 탔다. 그런데 택시의 경로가 이상했다. 신호등을 많이 받는 길로 돌아서 갔다. 다시 네이버 지도를 켜서 도착 시간을 봤다. 출근 시간보다 3분 늦게 도착한다고 예상했다. 빠르게 가달라고 기사분을 재촉했다. 내 목소리가 안 들렸는지 속도는 똑같았다. 더 크게 말했다. 이번에도 듣는 둥 마는 둥 백미러로 한 번 쳐다보시고 말았다. 원래 성격이 여유로운 분이신가. 나 혼자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겨우 1분 전에 응급실에 도착했다. 허겁지겁 인계가 시작되었다.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최대한 집중해서 일을 시작했다. 그날따라 환자들이 자꾸 빨리 해달라며 재촉했다. "저는 방금 온 간호사고요. 왜 저에게 화를 내세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네 확인하고 말씀드릴게요" 그전에 업무가 밀려있었다. 하지만 욕은 내가 다 먹었다. 억울하고 화난 감정이 올라왔다. 그럼에도 감정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아침에 시끄러운 알람을 끄던 것처럼 최대한 여유롭게 행동했다. (사실 여유로운 척에 더 가깝다) 그러나 나도 사람인지라 반복되는 알람 소리에 점점 한계가 왔다. 화를 내는 사람들도, 짜증을 내는 사람들도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도대체 이 알람 삭제 버튼은 어디에 있는 걸까.
얼마 후 나도 크게 소리치면서 일을 했다. 저녁시간이 되었다. 동료에게 잠깐만 부탁하고 도망치듯이 나왔다. 큰 기대는 안 했지만 메뉴는 엉망이었다. 차라리 환자밥이 더 맛있을 것 같았다. 어차피 입맛도 없었다. 대부분을 남기고 식당을 나왔다. 그리고 전쟁터에 끌려가는 군인처럼 두려움을 안고 응급실에 다시 돌아왔다.
환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날이 추워져서 밖에서 계속 밀고 들어왔다. 오늘따라 유독 더 바쁘게 느껴졌다. 점점 정신이 아득해졌다. 눈앞이 새하얗게 변할 즈음에 어느 간호사의 명언이 들려왔다. "오늘 힘드셨죠. 선생님 얼른 인계 주시고 집에 가세요."
옷을 후딱 갈아입고 최대한 빨리 병원 밖으로 나갔다. 추운 날씨 때문에 한껏 몸을 웅크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기진 맥진 했다. 입었던 옷을 벗고 대충 걸었다. 대충 씻었다. 집에 있던 걸로 대충 밥을 먹었다. 유튜브 보면서 쉬다 보니 새벽 3시가 되었다. 침대로 돌아가서 누웠다. 내일은 또 얼마나 바쁠지 걱정이 됐다. 한참을 뒤척이다가 잠에 들었다.
2
다음 날 아침 여유롭게 일어났다. 알람을 10개는 맞추고 잠에 들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8번째 알람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천천히 씻고, 천천히 머리를 말리고, 밥도 꼭꼭 씹어서 먹었다. 고작 1시간 일찍 일어났는데 온 세상이 평화롭게 느껴졌다. 마음에 안정은 몸을 노곤노곤하게 만들었다. 잠깐 소파에 앉아 유튜브를 봤다. 나도 모르게 잠에 들었다. 어김없이 찾아온 싸한 느낌에 눈을 떴다. 시계를 봤는데 출근까지 20분이 남아 있었다. 그럼 그렇지 또다시 타임어택 시작.
오늘은 무조건 버스를 타겠다고 다짐했다. 어릴 적 육상 선수를 했던 기억을 되살려 맹렬하게 뛰었다. 그때 코치님은 양쪽 팔을 시원하게 앞, 뒤로 크게 흔들면 속도를 30% 향상 시킨다고 했다. 덕분에 3분 만에 도착했다. 승리감을 느끼며 금방 도착한 버스에 올라탔다. 기사님에게 기분 좋게 인사를 했다. 교통카드를 찍으려는데 지갑이 텅 비어 있었다. '엥? 어디 간 거지?' 시원하게 흔들어댔던 팔이 문제였다. 손에 들고 있던 지갑에서 카드가 시원하게 탈출한 거다. 버스는 이미 출발했다. 이마에서는 땀이 뚝뚝 떨어졌다. 긴장한 목소리로 기사님에게 말했다.
"기사님. 제가 뛰어오다가 지갑에 있던 카드가 바닥에 떨어졌나 봐요. 방금 차 타자마자 알았네요. 죄송하지만 혹시 계좌 이체라도 가능할까요?"
붕어빵 사 먹는 것도 아니고 버스에서 계좌이체라니.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기사분은 나를 한 번 쳐다보시더니 쿨하게 뒤로 가라는 손짓을 하셨다.
"다음번에는 잘 확인해 주세요"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이마에서 흐르던 땀이 동정을 유발했나? 어쨌든 편히 앉아서 땀을 식혔다. 버스 타이밍도 좋았고, 그의 배려 덕분에 기분도 좋았다. "어쩌면 오늘은 운이 좋을 수도?"는 무슨 그날도 1분 전 병원에 도착했다. 그래도 느낌은 묘하게 달랐다. 일단 지각하지 않음에 감사함이 들었다.
역시나 응급실에는 환자가 많았다. 특히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서 온 환자가 큰 소리로 화를 내고 있었다. 상처를 봤는데 너무 아파 보였다. 엑스레이를 보니 갈비뼈도 3개나 부러져있었다. “얼마나 아프면 화가 났을까. 나도 자전거 타는 거 좋아하는데.” 안타까운 느낌을 갖고 일을 시작했다.
자전거 환자의 치료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기흉과 같은 합병증이 없었기 때문이다. 갈비뼈 골절은 대부분 6-8주에 걸쳐 자연적으로 치료된다. 그래서 입원이 아닌 집으로 귀가할 수 있었다. 환자는 밖으로 나가면서 너무 감사했다고 인사를 했다. 칭찬에 얼굴이 붉어졌다. "아니에요. 당연한 일은 한 건데요" 뒷머리를 긁적이며 똑같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기쁜 마음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어제 보다 맛있는 메뉴도 좋았다. 남자의 심장, 남자의 소울푸드 제육볶음이 나왔다. 포클레인처럼 국자로 가득 퍼서 밥 위에다가 올렸다. 순간 식당 여사님과 눈이 마주쳤다. 마음껏 먹으라는 여사님의 말에 세 국자나 올렸다. 식판 위에 남은 거 없이 싹싹 비웠다. 든든하게 풀충전되어 응급실로 다시 돌아왔다.
밥을 먹고 와도 여전히 바빴다. 정신없이 일을 하고 있는데 어느 간호사가 나에게 와서 말했다. "선생님 오늘도 많이 바쁘셨죠. 얼른 인계 주시고 집에 가세요" 어라 벌써 집에 갈 시간이 되었다. 시간이 순삭 당했다. 옷을 갈아입으면서 오히려 바빠서 좋았다는 이상한(?) 생각까지 들었다.
하늘을 봤는데 달이 빛나고 있었다. '원래 달이 저렇게 밝았었구나.' 생각해 보니 퇴근길은 항상 땅만 보면서 걸었다. 집으로 들어와서 시간을 보니 오후 11시였다. 평소랑 똑같은 귀가 시간이었다. 오늘은 뭔가 일찍 눕고 싶었다. 따뜻한 물로 기분 좋게 씻고 방에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았다. 출근길 감사했던 순간부터 퇴근길 밝았던 순간들이 생각났다. 분명 오늘도 바쁘게 일을 했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왜냐하면 생각보다 행복했기 때문이다.
일상 속 특별한 순간들은 언제나 숨어 있다. 오늘의 하루가 얼마나 예뻤는지, 어제의 걱정이 얼마나 쓸데없었는지, 우연히 만난 사람이 내게 어떤 가르침을 줬는지, 예상치 못한 공간에서 들은 소리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눈을 감고 되돌아보니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았다. 우리가 너무 바빠서 놓치고 있는 아주 보통의 하루 속에 함께하고 있었다.
571번 버스 기사님 배려 감사합니다. 덕분에 하루가 행복했습니다. 내일 버스 탈 때는 카드 2번 찍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