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명절에 하는 오프는 운이다. 올해는 설 직전에 투오프를 받았다. 연휴를 맞아 고향으로 갈 수 있다. KTX를 예약하러 들어갔다. 대기자 3만 명이 찍혔다. 포기하고 인터넷을 껐다. 그래, 명절에 투오프라니 왠지 운 좋다고 했다. 혹시나 해서 10분 뒤에 다시 봤다. 2만 명으로 바뀌었다. 아 이거 계속 안 보고 있어도 되네! 1시간 뒤 들어가 보니 대기자 0명. 생각보다 쉽게 예매했다.
명절에 하는 지하철은 조용하다. 특히 1호선이 조용했다. 빌런이 없다. 호객 행위가 없다. 앉을자리가 많다. 청량리역에만 사람들이 많았다. KTX 기차를 탔다. 내 좌석에 누가 있다. 다시 폰을 봤다. 분명 내 자리가 맞다. 조심스레 폰을 내밀었다. 입석인데 잠깐 앉았다며 자리를 비켜줬다. 음 예매가 쉽지는 않았나 보네. 앞에서 의자를 심하게 젖혔다. 제일 끝까지 젖혔다. 의자와 다리 사이가 좁아 부딪쳤다. 드디어 빌런을 발견했다. 법륜스님의 유튜브를 봤다. 스님이 말씀하셨다. “그럴 수 있지.” 그래, 그럴 수 있나? 이후 1시간 30분을 달렸다. 이번 역은 영주역이라는 방송이 나왔다. 급하게 일어났다. 내 다리가 앞 의자에 걸렸다. 쾅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앞에 앉았던 사람이 으악 하면서 소리쳤다. 앞에서 의자를 다시 당겼다. ‘아이코. 그럴 수 있죠.’
명절에 하는 기차역은 붐빈다. 특히 지방일수록 더 붐비는 듯한 느낌이다. KTX에서 내리자마자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소똥 냄새가 풍긴다. ‘아따 공기 좋노!‘ 최근에 기차역을 새로 지어도 똑같다. ’그래 이 냄새. 꼬소 하이 처쥑이네!‘ 자랑스러운 내 고향 경상북도 영주다.
명절에 하는 인사는 정겹다. 우리 가족은 “별일 없었지?“라는 말과 함께 따뜻하게 포옹한다. 별 일이 없던 삶에 별 일을 만들어준다. 처음 시작은 31살 막내인 나였다. 초창기에는 징그럽다고(아빠가), 냄새난다고(엄마가), 더럽다고(누나가) 싫어했다. 피할수록 달려갔다. 무시할수록 무시했다. 등스매시 맞아도 계속했다. 3년 정도 해보니 어엿한 가족 인사가 되었다. 포옹을 하면 서로 마음이 쉽게 오고 간다. 서로의 체온이 따뜻해진다. 만날 때도, 헤어질 때도 생각보다 오래간다. 진심으로 한 번 해보는 걸 추천한다.
명절에 하는 새배가 달라졌다. 먼저 누나들과 내가 돈 봉투를 숨긴다. 부모님에게 새배받아 주시라고 말한다. 그러면 나란히 소파에 앉으신다. 누나들과 맞은편에 나란히 선다. 우리는 서로 눈치를 본다. 큰누나가 먼저 새배를 드리면 얼른 따라서 절을 한다. 큰누나가 먼저 일어나면 얼른 따라서 일어난다. 부모님께 올해도 건강하시라는 말씀을 드린다. 동시에 옷 속에 숨겨뒀던 용돈을 꺼내서 드린다. 부모님의 표정이 밝아지신다. 아까 포옹할 때보다 10배는 더 좋아하신다. 봉투 안을 보신다. “어이구, 왜 이렇게 많이 넣었노” 약 60배는 더 좋아하셨다. 용돈은 진리다. 여유 있을 때마다 해보는 걸 강력 추천한다. (시간이 갈수록 배수가 우상향 할 수 있으니 주의.)
명절에 하는 덕담은 시원 섭섭하다. 며칠 전 아빠가 은퇴를 하셨다. 덕담을 하시는데 시원 섭섭하다는 말로 시작하셨다. 아빠는 40년 동안 일을 하셨다. 매일 출근하면서 오늘만을 기다렸다고 했다. 그동안 아이들 3명 키운다고 어쩔 수 없이 다녔다고 했다. 은퇴는 시원했지만 그건 딱 3일이라고 했다. 첫날 알람소리 없음, 둘째 날 여유롭게 산책, 셋째 날부터 이상함이 감지됐다. 당연히 가야 할 곳이 없어지니 섭섭하다고 했다. 내 머릿속에는 ‘미리 노후를 위해 취미라도 준비해두셨어야죠!‘라는 말이 떠올랐다. 나는 그 말을 소화시켰다. 우리 3명을 키우시느라 누구보다 치열하게 사신걸 알기 때문이다. 우리 3명 모두 입모아 이야기한다. “그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명절에 하는 윷놀이는 재밌다. 가족들과 오손도손 앉아 있을 수 있다. 서로의 얼굴을 자세히 쳐다본다. 웃는 얼굴은 덤이다. 아빠 모습이 생각보다 안 늙었다. 엄마 피부가 생각보다 하얗다. 큰누나 턱이 생각보다 브이 라인이다. 작은 누나 치아가 생각보다 누렇다. 윷놀이가 원활히 진행 중이다. 텔레비전 없이도 대화가 가능하다. 돈 이야기 없이도 대화가 가능하다. 누가 앞으로 더 가나, 누가 빠꾸(뒤로 가기) 하나, 누가 잡아먹나, 누가 이기나, 지나 재밌다. 사실 현금을 두고 해서 더 재밌다. 일부러 부모님 용돈을 드린 후에 바로 윷놀이를 가져왔다. 그때 해야 판돈이 크다. 1:1 게임인데 돈을 따면 적이 많아진다. 돈을 잃으면 놀림받는다. 내가 개평이라고 천 원 주니 안 받는다. 오히려 불난 집에 부채질하냐고 욕먹는다. 욕먹어도 괜찮다. 아빠 5만 원 감사합니다^^
명절에 하는 눈싸움은 신난다. 이번 설 명절에는 까치가 아니라 눈이 왔다. 처음에는 날 춥다고 안 나갔다. 눈이 자꾸 쌓였다. 어릴 적 추억이 생각났다. 누나들을 억지로 끌고 밖으로 나왔다. 나오자마자 다시 들어갈까 고민했다. 바람이 너무 강해서 눈보라가 불었기 때문이다. 이제 확실히 모든 곳이 시리긴 하다. 약한 소리 그만.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럼 진짜 늙은 거다. 억지로 추운 눈을 만지기 시작했다. 어? 누가 나한테 던졌다. 큰누나 일까? 작은 누나 일까? 1:2로 싸웠다. 신기하게 따뜻해진다. 눈 뭉치만 던지기가 시시해졌다. 누나 한 명씩 번쩍 들었다. 눈 밭 위에 던지듯 놓았다. 돌돌 김밥 말듯 굴렸다. 감정이 풀린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3살 버릇 80살까지 갈 거다.
명절에 하는 고향 맛집은 항상 바쁘다. 가게 되면 꼭 먹는 게 있다. 바로 영주 랜떡이다. 매콤한 고추장에 양배추, 파, 어묵국물, 큼직한 쌀떡 넣어 섞은 게 끝이다. 고추장에 마약이라도 넣었나. 이미 20년간 노예가 됐다. 분명 간단한데 간단하지 않은 맛이다. 서울 올라가기 전에 포장하러 갔다. 기차 시간 30분 전에 갔다. 운이 좋았다. 앞에 줄이 10명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한 명당 1분, 10분이면 가능할 것 같았다. 10분이 지났다. 앞에 2명 남았다. 앞에서 주문하는 소리가 들렸다. “떡볶이 10만 원어치 포장이요” 뭐야 반칙이다. 혼자 다 쓸어가는 거 아니야? 아니 그보다 시간이 없다. 포기할까? 아니야 말이라도 해보자. “저 죄송한데.. 기차 시간 15분 남았어요. 정말 먹고 싶어요. 저 내일 출근해야 해서 여기 당분간 못 와요. 먼저 오천 원만 사도 될까요?” 구구 절절한 노예의 절규가 통했다. 남은 시간 14분. 기차역까지 12분. 열심히 뛰어서 탔다.
명절에 하는 출근길은 조용하다. 벌써 내일부터 다시 출근이다. 공휴일에 출근하는 건 익숙해지지 않는다. 6년째 똑같이 외롭다. 특히 데이(6am) 출근이 가장 외롭다. 매일 마주쳤던 출근 동지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명절에 하는 일은 쉽지 않다. 병원은 바쁘다. 정확하게는 내가 일하는 응급실이 바쁘다. 외래가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환자들 대부분 배가 아프다고 찾아온다. 술, 전, 고기, 산적, 심지어 이쑤시개까지 먹고 온다. 도대체 얼마나 맛있는 산적이야! 나도 간절하게 먹고 싶다. 이쑤시개든, 생선뼈든 너무 깊게 들어가면 내시경이 필요하다. 명절 공휴일 기간에는 내시경이 어렵다. 올해 명절에는 다들 음식 천천히 맛있는 것만 드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