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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의 예술

거절도 잘하면 예술이 된다.

by 태섭

"혹시 내일 시간 괜찮아?"

"몇 일날 뭐 해? 약속 있어?"


나는 계획형 인간이다. MBTI 검사 결과 'J' 100%다. 평소 계획 세우고, 약속 잡는 걸 좋아한다. 사실 즉흥적으로 만나는 게 불편하다. 어디를 가도 가성비가 없다고 느껴진다. 재밌게 놀고 있어도 뭔가 해야 할 일이 자꾸 생각나고 걱정된다. 나는 그런 사람인가 보다.


즉흥적인 것들에 불편함을 없애는 방법이 있다. 바로 내가 먼저 제안하거나 부탁하는 거다. 하지만 큰 단점이 있다. 바로 거절에 대한 상처를 입는다는 거다. (마상마상) 보통 10번을 제안하면 9번은 거절당한다. 그럴 때마다 아프다. 따갑다. '내가 너무 빨리 만나자고 했나? 나랑 만나기 싫은가? 내가 싫나? 내가 냄새나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나는 그런 사람인가 보다..


거절의 상처는 쉽게 치료되지 않았다. 아물지 않은 상처를 보면서 생각했다. '아 남들에게는 상처 주지 말아야지' 그래서 다른 사람의 제안과 부탁은 쉽게 거절하지 않았다. 즉흥적인 약속을 그토록 싫어하지만 10번 중 8번은 승낙했다. 시간이 많이 남은 약속은 대부분 승낙했다. 부탁은 돈 빌려 달라는 거 빼고는 거의 다 들어줬다. 좋게 말하면 정이 많았고, 나쁘게 말하면 바보.. 나는 그런 엄청난 바보였다!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한 대가는 컸다. 내 시간을 맘대로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직장에서 "오늘 일 끝나고 술 한잔 콜?" 선배나 교수님이 제안하면 거절하기 가장 어려웠다. '괜히 내가 거절했다가 나를 싫어하면 어떡하지. 나랑 어색해지면 어떡하지. 아 오늘은 집에서 푹 쉬고 싶었는데 어떡하지.' 수많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고민 멈춰! 상처 멈춰! 학교 폭력 멈춰!


갑작스러운 교수님과의 자리에 혼자 갈 수는 없었다. 맛있는 거 먹으러 간다는데 무려 소고기 먹으러 간다는데 혼자 가는 건 사치다. 그래 후배도 데리고 가야 했다. 좋은 건 같이 나눠야 하니까. 머릿속에 떠오르는 '물귀신'은 지우고 '럭키비키' 마인드를 채웠다. 그리고 눈앞에 보인 (먹잇감) 친한 후배에게 가서 말을 걸었다.


"교수님이 오늘 일 마치고 고기 산다는데? 야 그 표정 뭐냐. ㅇㅇ 소고기임. 같이 가서 다 쓸어먹자! 오늘 콜?"


그 말을 들은 후배는 기분 좋게 웃으면서 "와 교수님이요? 오 그럼 1++ 먹겠네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예상밖이었다. "태섭쌤 미안한데 조금만 더 고민해도 될까요?"


'어? 웃었는데 바로 간다고 안 하네?' 싫다는 건지, 좋다는 건지 괜히 나 혼자 안달이 났다. 1시간쯤 지났을 때 후배가 말했다.


"태섭쌤. 1++ 먹으러 간다는데 초대해 주셔서 고마워요. 사실은 오늘 일 끝나고 푹 쉬려고 했어요. 몸 컨디션이 조금 나아지면 가려고 했는데 변화가 없네요. 괜히 제가 갔다가 텐션이 떨어지면 어떡하죠? 분위기가 안 좋아질까 봐 걱정되네요. 혹시 oo선생님한테도 물어보셨어요? 어제부터 고기 먹고 싶다고 했거든요. 오늘 기분도 좋아 보이던데 한 번 물어보는 게 어때요?"


분명 거절을 당했는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핑계 대지 않는 모습이 좋았다. 특히 본인 때문에 분위기가 저하될까 봐라며 조심스레 말하는 부분이 '예술'이었다. 나도 사실 후배의 평소 텐션이 좋아서 같이 가자고 했다. 그런데 지금 보이는 상태를 보면 오히려 서로에게 불편한 자리가 될 것 같았다. 후배가 말한 oo선생님을 봤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기분이 날아가고 있었다. 대변이라도 시원하게 본 건지 아주 좋아 보였다. (역시 대변은 가성비 좋은 직장에서) 교수님과 같이 고기 먹으러 가자고 (무려 1++이라고) 물어봤더니, 마침 아침부터 엄청 당겼다면서 굉장히 좋아했다. 결국 oo선생님을 데려간 게 신의 한 수가 되었다. 고기도 너무 맛있었고, 분위기도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거절했던 후배 덕분에 모두가 기분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거절을 해도 관계가 상하지 않게, 아니 어쩌면 승낙보다 더 기분 좋게 거절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능글맞은 후배가 그랬다. 그들은 거절을 함으로써 본인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좋은 경험을 준다. "아니 거절을 하는데 어떻게 타인도 좋아할 수가 있어?" 그래서 '거절의 예술'이다. 우리는 거절을 할 때 보통 우리만 생각한다. '아 오늘은 푹 쉬고 싶은데', '그날은 내가 선약이 있는데' 나 자신만 생각한다는 게 잘못된 건 아니다. 물론 그렇게 거절해도 된다. 다만,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넌 절대 안 돼!"

"그거는 절대 못해!"

"아니. 나는 안 할 거야. 너 혼자 해!"


이렇게 거절을 외치는 건 적을 만드는 방법이다. 좋은 거절의 기술이 아니다. 관계를 유지하면서 "아니요"라고 말하는 예술은 아래와 같다.


1. 초대를 받거나 상대방이 기회라고 믿는 어떤 이야기를 제안받을 때, 일단 그들의 말을 경청하기.

2. 그러고는 나를 생각해 줘서 고맙다고 말하기.

3. 내 생각과 맞지 않다면 가볍게 거절하기.

(주의할 점은 핑곗거리 찾지 않기. 어차피 다 뻔히 보이고 들통남. 오히려 담백한 거절이 더 와닿음.)

4.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건 항상 제안에 감사하다는 마음을 먼저 알린 후 거절하기.


그들은 타고난 건지, 공부한 건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건 본인뿐만 아니라 타인도 생각해 주면서 거절한다는 거다. '엥? 타인을 생각하면 거절을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아니다. 오히려 거절을 못해서 억지로 텐션 올리는 건 민폐다. 그런 기분으로 함께하면 서로에게 손해다. 왜냐하면 불편한 시간을 함께 하는 것처럼 힘든 건 없기 때문이다.


나는 타고나지 않아서 거절을 공부하기 위해 책을 봤다. 책 '당신의 방에 아무나 들이지 마라'에서는 다양한 거절의 기술을 소개했다. 거기에 나온 내용과 내 생각을 덧붙여서 거절의 <호박>, <단호박> 버전을 만들어봤다.


<호박 버전>


"고맙지만 괜찮아."

"만약 내가 승낙한다고 해도 널 실망시킬 것 같아. 난 네가 성공하면 좋겠어"

"내 역량이 부족해서 이건 나에게 무리가 있어. 다른 사람을 찾아보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이건 내가 하기에는 어려울 것 같아. 대신에 이걸 잘하는 다른 사람이 있어. 내가 한 번 물어볼까?"

"아쉽지만 요즘 나에게는 중요한 가치가 아니야. 네가 말한 가치에 걸맞은 다른 사람이 있을 거야. 그런 사람들에게는 아주 좋은 제안이 될 것 같아. 물어봐줘서 고마워."

"솔직하게 나는 너를 믿어. 근데 너뿐만 아니라 다른 누구를 위해서도 이런 일은 못해"

-> (돈 빌려 달라고 할 때)


<단호박 버전>

"나는 서로에게 물들 정도로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만 자주 만나. 너랑 또 만나는 건 조금 더 생각해 볼게. 왜냐하면 너의 걱정/분노/부정적 습관이 전염될까 봐 걱정돼."

->(거리를 두고 싶을 때)

"네가 하는 말을 한 번 들어는 볼게. 하지만 이 대화가 끝난 후에도 내 대답은 변하지 않을 거야."

->(돈 빌려 달라고 할 때)


이런 호박 거절을 할 때 주의할 점이 있다. 당신의 거절이 진정성 있게 전해져야 한다는 점이다. 상대가 자신의 거절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까 봐, 화를 낼까 봐, 혹은 나쁜 사람처럼 비칠까 고민하는 순간 어려워진다. 괜히 복잡한 속임수나 잔꾀를 쓰면 오히려 더 심각한 위기에 빠질 수 있다. 예의를 지키면서 솔직해지는 것이 서로를 위해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인간은 혼자 살 수 없잖아요. 서로 도우며 살아야 하잖아요."


진심 어린 부탁에서는 고민이 되는 게 사실이다. 이 각박한 세상 혼자서 산다고 생각하는 건 끔찍하다. 나도 언젠가는 도움을 받아야 할 때가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내가 감당 가능할 때 도와줘야 한다. 충분히 들어줄 수 있을 때 들어줘야 한다.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는 건 오히려 서로 간의 입장만 난처해질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 번이라도 남에게 부탁해 본 사람이라면 알 거다. 사실 부탁한 사람의 마음 한편에는 거절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있다. '에이 내 부탁인데 100% 들어줘야지!' 이런 사람은 세상에 없다. 있다면 손절각 나왔다. 그 사람과는 멀리해라. 왜냐하면 당신을 노예 비슷한 걸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당신만 있는 건 아니다. 안 받아도 다른 사람이 분명히 있다. 굳이 신경 쓰면서 골치 아파할 필요는 없다.


이제 더 이상은 거절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갖지 말자. 우리는 타인의 요구에 최대한 '네'를 외치고 싶지만, 때로는 너무 큰 대가가 따른다. 거절이라는 결정을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자.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거절의 예술은 아주 간단하다. '아니요'라고 말한 다음, 당신이 자신을 위해 옳은 선택을 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넘어가자. 그래도 불편하다면 위에서 언급한 ‘거절의 예술’이 당신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시간은 내가 가진 유일한 동전이고,

그 동전을 어디에 사용할지는

오직 나만 결정할 수 있다.

다만, 다른 사람이 내 동전을

써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칼 샌드버그 (Carl Sandbu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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