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의 아침
요즘은 체코 프라하에서 지내는 중이다. 카를교가 잘 보이는 곳에 숙소를 잡았다. 시간이 진짜 빠른 게 벌써 한 달이나 지났다.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이유가 있다. 하루종일 동유럽의 아늑한 분위기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런 여유는 살면서 처음 느껴봤다. 심지어 알람도 맞추지 않는 삶이라니! 오늘도 창밖에서 들어오는 밝은 햇살에 눈을 떴다. 옆에는 민지가 코를 새근새근 골면서 자고 있다.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고 밖으로 나왔다. (깨우면 깨문다.)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하고, 이를 닦고, 모자를 푹 눌러썼다. 1층에 있는 150년 된 카페에 가기 위함이었다. 서둘러서 노트북이랑 폰을 챙겨서 밖으로 나갔다.
"Dobré ráno (도브레 라노, 아침인사)" 내가 카페의 첫 손님이었다. 묘하게 기분 좋았다. 사장님은 야외 테이블을 밖으로 꺼내고 있었다. 노트북을 잠깐 내려 뒀다. 옆에 가서 사장님을 도와드렸다. 왜냐하면 그래야 야외 테이블에 빨리 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유로운 체코에 와도 30년 묵은 빨리빨리 습관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야외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가 있다. 왼쪽 가장 구석진 자리! 거기가 다른 테이블이랑 그나마 멀리 떨어져 있고, 혼자 있기에 가장 편안하다. 게다가 뜨거운 아침 햇살도 피할 수 있다. 프라하는 특유의 맑고 선명한 햇살이 있다. 햇살이 심하면 노트북 밝기를 최대로 올려도 잘 안 보인다. 여기는 프라하에서도 가장 선명하게 내려쬐는 장소다. 보통 한국에서는 정남향을 좋아하는데, 체코에서는 정동향을 좋아하나 보다. 아마도 이 햇살 덕분에 150년 전통을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자리에 앉아 있으니 사장님이 다가왔다. 나는 고민도 없이 따라(따뜻한 라테)를 주문했다. 이 집은 라테가 제일 맛있다. 아 여기 아라(아이스라테)는 절대 안 된다. 얼음이 없다! 엄청나게 미지근하다! 날이 아무리 뜨거워도 내가 무조건 따라만 마시는 이유다. 따가운 햇살을 맞으며 라테를 한 모금 들이켰다. 향기와 쓴맛. 음 역시 150년의 전통은 달라도 한참 다르다. 커피 장인이 손가락이라도 한 번 넣었다가 빼셨나? 항상 짭짤-달달-오묘한 손맛이 느껴진다. 굳이 비교하자면 가격은 메가커피의 2배인 5천 원인데, 맛은 그것에 딱 150배랄까.
김이나는 라테를 옆에 치웠다. 휴 드디어 오늘의 주 목적인 노트북을 열었다. 이번 주는 좀 바쁘다. 주말에 민지랑 같이 오스트리아 할슈타트에 놀러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원고 할당량을 다 채우려면 오후까지는 바쁘게 글을 써야겠다. 올해 크리스마스전에 생애 첫 에세이 출판이 예정되어 있다. 평소 좋아하던 출판사에서 운 좋게 연락이 와서 더 열심히 쓰고 있는 중이다. 메모 앱을 눌렀다. 이제 10% 정도 썼구나. 오늘만 민지 혼자서 놀라고 해야겠다. 좋아하는 편집샵 실컷 보니까 오히려 좋아할 수도 있겠다. 이따가 밥이나 같이 먹어달라고 해야지.
나도 혼자서 글을 쓰고 있으면 재미있다. 순식간에 상상의 나라로 간다. 허구의 내용을 쓴다는 말이 아니다. 예전에 있었던 일들이 아주 자세하게 생각난다는 말이다. 문득 작년까지 일했던 응급실이 생각났다. 작가 대선배님 '남궁인' 교수님이랑 대화하던 것들이 떠올랐다.
"교수님 도대체 일기랑, 에세이랑 차이가 뭐예요?"
"음 사실 구별할 수 없어. 다른 사람과 공감하게 되는 건 일기나 에세이나 똑같거든. 굳이 구별하자면 아주 예쁘게 잘 다듬은 글이 에세이랄까?"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내 질문이 잘못되었다. 내심 신경 쓰여서 글 쓰기가 더 어려워졌다. 에이 몰라. 그냥 가볍게 생각해야겠다. 편하게 일기를 쓴다고 생각하자. 다만, 있었던 일을 최대한 자세하게 생각해서 사실대로만 쓰자. 편하게 마음먹으니까 갑자기 글이 술술 적혔다. 역시 힘을 준다고 해서 잘 되는 건 하나도 없다. 3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오전 11시, 햇살이 방향을 틀었다. 이제는 노트북과 온몸이 뜨거울 정도다. 선글라스라도 챙겨 오면 좋았을 텐데. 마침 민지가 일어났으니까 나올 때 챙겨서 나오라고 연락했다. 주위를 둘러봤다. 야외 테이블에 손님들이 가득 찼다. 스트레칭하는 척 사람 구경을 했다. 글을 쓰고 나서부터 사람 구경하는 게 취미다. 가끔씩 글쓰기에 좋은 소재가 된다.
바로 오른쪽에 앉은 노부부는 아점을 먹으러 왔나 보다. 할머니는 토마토 수프에 마늘빵 비슷한 걸 찍어 먹고 있다. 할아버지는 멀건 옥수수 수프에 밀가루 반죽 몇 개를 먹고 있다. 마치 한국식 수제비 같다. 우리 엄마가 해주는 수제비도 정말 맛있는데. 보자마자 입안에 침이 고였다. 그 옆에는 여자 두 명이서 나란히 앉아있다. 둘 다 30대처럼 보이긴 하는데 10대 일수도 있다. 서양 사람들 나이 맞추기는 확실히 어렵다. 동양인보다는 노화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다. 특히 얼굴에 있는 주름은 안타까울 정도로 많이 보인다. 나중에 노화를 방지해 주는 알약이 나온다면 동양 보다는 서양에서 더 잘 팔릴 것 같다. 마지막으로 오른쪽 끝에는 동양인 남자가 앉아있다. 나랑 아주 비슷한 차림새다. 모자랑 선글라스를 끼고 아까부터 노트북 중이다. 화면에 빨려 들어갈 것 같다. 저 사람도 여행자는 아닌 것 같다. 여기서 잠깐 살고 있는 사람일까? 일본인일까? 중국인일까? 어 모자가 뉴욕양키즈인데? 이건 99% 한국인이다. 화장실 가는 김에 슬쩍 다가가서 말 걸어봐야지.
"Dobrý den” (도브리 덴, 낮인사)" 혹시 한국인이세요?"
(위 내용은 상상 속 저의 꿈입니다.)
돈벌이에 대해 더는 고민할 필요가 없다면 삶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 봤다. 1달, 2달 아니 몇 년이 되든지 시간은 온전히 내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유럽에서 글을 쓰고 싶었다. 곧 아내가 될 여자친구의 손을 잡고 체코 프라하로 떠나고 싶었다. 그곳에서 글을 쓰면서 지낸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아내의 손을 잡고 매일을 여행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우리는 왜 꿈을 포기하고 살까? 내가 아는 한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꿈을 이룰 '방법'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모두가 상상해 보라고 하면 나처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현실에 안주하는 주된 이유는 '돈과 시간'이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났는데 ‘돈’ 따위 신경 쓰지 않는 세상이 온다면 어떨까? ‘시간’ 따위 신경 쓰지 않는 세상이 온다면 어떨까? 그날이 오기를 바라며 오늘도 힘차게 살아간다. 아 너무나도 설렌다. 여행을 가기 전에는 누구나 설레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