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삶의 뒤안길에서 문득
산티아고 순례 일정을 불가피하게 앞당겨 끝내자,
모로코는 뜻밖의 선물처럼 우리 앞에 불쑥 다가왔다.
그렇게 모로코에 첫발을 내디딜 때만 해도
이곳이 이렇게 마음 깊숙이 스며들 줄은 몰랐다.
마라케시의 붉은 골목길을 걸을 때면,
먼 곳에서 날아온 사막의 흙먼지가 공기 속에 묻어 있었다.
노새와 자전거, 오토바이와 자동차, 관광마차가 뒤섞인 혼잡한 길을 건널 때면
긴 겉옷 젤라바(Djellaba)를 입은 현지인 옆에 바짝 따라붙어 걷고 싶어지곤 했다.
그런가 하면, 카사블랑카의 메디나 골목길을 돌아서자
대서양을 품에 안은 듯 장엄하게 서 있는 하산 2세 모스크의 거대한 돔,
그리고 첨탑에서 흘러나오는 아잔(Adhān)의 구성진 가락이 마음을 적셨다.
모로코에 머문 며칠 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들려오는 아잔 소리를 듣다 보면
이 소리가 단순한 종교 의식의 알림이 아니라
이곳 사람들의 삶을 잇는 생명의 숨결처럼 느껴졌다.
바쁜 시장 한복판에서도, 오토바이 경적이 넘실대는 거리 한가운데서도
누군가의 기도 시간만큼은 모든 것이 잠시 멈춘 듯 했다.
그 고요 속에서 오히려 이들의 고단한 삶이
천천히 희망과 꿈으로 되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모로코에서는 바쁨과 느림이 한 풍경 안에 있었다.
분명 눈앞에 보이는 것들은 정신없이 바쁘나,
그 가운데도 모든 것이 조금 늦게 움직이는 듯한 모습은 은근히 마음에 편안함을 주었다.
아침이면 골목마다 번지는 민트티 향 속에
눈만 마주치면 따뜻한 인사를 건네던 사람들,
그리고 식탁 위로 조용히 흘러드는 햇살.
어쩌면 평범한 하루의 풍경 같지만,
그들의 일상 안에 자연스레 한데 스민 듯한 느낌 그대로가 좋았다.
사진 찍히기를 좋아하는지, 한국을 좋아하는지,
(뜻밖에 모로코에 있는 동안 한국여행객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기꺼이 먼저 다가와
밝은 미소로 마음을 건네던 이곳 사람들에게 우리도 어느새 정이 들었다.
풍경보다 오래 남는 것은 결국 사람의 삶이었다.
모로코에서의 열여덟 날 동안
그들의 시간 속에 잠시 머물렀을 뿐인데,
그 느림과 온기가 우리 삶에도 번져들었다.
이제는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하지만 이 여정은 끝이 아닐테다.
언젠가, 어느 뒤안길에서 문득 이 날들을 떠올린다면
우리는 아마 이렇게 회상할 것같다.
모로코의 햇살과 바람,
그리고 사람들 환한 미소가
지금도 그곳의 시간을,
그리고 내 마음의 한자리를 비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