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천후 플레이어란 이런 것
진짜 멋쟁이는 발끝에서 드러난다고 했던가.
패션을 아는 사람일수록 신발에 신경을 쓰고, 진짜 멋을 아는 사람일수록 양말을 맞추어 입는다고 했다.
아주 정확하게, 둘 다 나를 비껴간 이야기다.
그렇다고 지나가는 사람 바짓가랑이 붙잡고 내가 패셔니스타로 인정받고 싶은 것은 아니다.
난 그냥 이런 사람이다
: 신발 고를 때 고민하고 싶지 않은 미니멀리스트
나에게 꼭 맞는 신발이 운명처럼 다가올 거야.
무슨 동화 속 대사 같은 이 말을 마음속에 항상 담아놓고 살기 시작한 건 20대 중반이 되어가고나서부터였다.
그전까지는 높은 구두, 낮은 구두, 플랫, 슬리며, 샌들, 까만 운동화, 하얀 운동화, 까맣지도 하얗지도 않은 운동화 등등 다양한 신발을 껴안고 살고 있었더랬다.
그렇다고 그 신발들을 모두 골고루 잘 신었느냐? 그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옷의 색에 맞춰서 신발을 잘 배치했느냐?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그냥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는데 마침 저렴해서 샀을 뿐이고, 현관에 나와 있으니 신었을 뿐이다.
그러던 내가 신발의 기준을 하나씩 세우기 시작한 건 친구들과 제주도여행을 떠나면서부터였다. 1박 2일의 아주 짧은 일정이라 잠옷, 갈아입을 옷 정도만 가방 하나에 챙겨 갔고, 여분 신발 따윈 없었다.
여행하면서 많이 걸을 테니 착용감이 편해야 했고, 사진도 찍어야 하니 예쁜 모양이면 좋겠다. 만약 비가 올 수도 있을 텐데 그럴 때를 대비해서 물에 젖으면 안 되는 신발들도 제외했다. 그랬더니 딱 한 켤레가 나왔다.
어디 대단한 데서 구입한 것도 아닌, 비싼 것도 아닌, 그냥 동네 홈플러스 신발코너에서 집어온 메리제인스타일의 단화였다. 바닥이 조금 얇긴 했지만 아스팔트의 울퉁불퉁한 표면을 느낄 정도로 얇은 건 아니었다. 맨질맨질한 검은 가죽-가격대로 유추해 보건대, 동물의 흔적은 전혀 느낄 수 없으니 이것 또한 합격!
동그란 앞코는 귀여움을 더했고 발등 부분이 넓게 트여있어서 신발을 신고 벗기도 아주 쉽고 빨랐다. 신발 중간을 가로지르는 하나의 줄 역시 허투루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귀여움은 배가시켜 주면서 발등을 제법 단단하게 잡아주니 걸어 다닐 때 신발이 헐떡거리지 않게 딱 잡아주었다. 게다가 사이즈는 얼마나 찰떡인지! 225와 230을 넘나드는 넓적한 내 발에 아주 양말처럼 착 감겼다. 덕분인지 하루에 만 오천보를 넘게 걸어도 피곤함을 못 느꼈다.
그러나 이 신발은 혜성처럼 내게로 왔던 것처럼 별처럼 스러졌다. 발등의 끈이 삭아서 다시 붙일 수 없을 정도로 해졌기 때문이다.
다급한 마음에 바로 홈플러스로 달려갔는데 이럴 수가. 이제 더 이상 그 신발은 팔고 있지도 않았다. 그냥 마트에 입점해서 팔리고 있던 신발이니 제대로 된 상표 같은 것도 있을 리 무방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길가의 모든 신발가게에 안테나를 세우고 다녔다. 하지만 운명의 신발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이후로 나는 함부로 신발을 구입하는 것을 주저하게 되었다. 어차피 무엇을 산다 하더라도 그 운명의 신발 한 켤레에는 못 당하는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신발>에 하나씩 조건표를 달기 시작했다.
첫째, 관리하기 쉬운 재질의 검은색일 것.
둘째,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옷에 어울리는 디자인일 것.
셋째, 운동까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여행 갈 때 신을 수 있을 정도로 편할 것...
그래서 운명의 신발을 잘 찾아냈냐면,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무엇보다 이 혹서와 혹한의 날씨를 모두 지닌 연평균 기온 차 40도에 육박하는 대한민국에서 일 년 내내 잘 신는 신발이란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게 가장 큰 사유다.
게다가 비는 왜 또 이렇게 많이 내리는지.
설상가상으로 2024년 여름 갑자기 족저근막염이 생겨버렸다. 정형외과 선생님과 의논도 하고 내 나름대로 연구해 본 결과, 나는 그냥 이제 운동화를 신어야 하는 발이 되어버렸다.
평소에도 운동화를 신고 다니다 보니 눈에 띄는 장점이 생겼다.
발이 편안한 덕분에 시간과 장소만 허락한다면 빠르게 걷기나 러닝 같은 운동을 바로 시작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마트 가는 길에 갑자기 공원이 나오면 가볍게 두어 바퀴 돌다가 장을 보러 갈 수도 있다.
지금 신고 있는 신발은 지난겨울이 가기 전에 구입했던 것으로 때가 잘 타지 않는 소재의 까만색 운동화다.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밑창까지 까만색이라는 점.
나는 1년 내내 까만색 바지만 입는데, 밑창까지 까만색인 신발을 신으면 바지 시작점인 허리부터 발 끝까지 색이 딱 하나로 통일된다. (참고로 양말도 까만색만 있다)
색의 연장은 다리길이의 연장으로 보인다고 하니 이걸로 나의 작은 키를 조금이라도 커버할 수 있다.
또, 밑창이 까만색이면 자주 빨지 않아도 신발이 더러워 보이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일부러 신발끈도 튀지 않는 검은색으로 골라서 매 주면, 멀찍이서 보면 그냥 검은색 한 덩어리로 보일 것이다.
덕분에 격식을 차려야 하지만 내가 주인공으로 주목받을 일 없는 제3자의 결혼식 같은 곳에는 그냥 운동화를 신고 참석한다. 그야말로 전천후 멀티플레이어와 같은 신발이다.
원래 신발은 두서너 개를 돌려가면서 신는 것이 신발 컨디션 유지에 좋다고는 하는데. 마음에 쏙 드는 신발 하나가 생겨버리면 그것도 참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덕분에, 신발장에 딱 서너 켤레만 두어도 잘 살 수 있는 미니멀한 신발장 비법이 되기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