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옷? 아니죠. 일 년 내내 입을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2023년 제일 잘한 일 중 하나로 꼽는 일이 있다. 바로 생애 처음으로 '기능성 티셔츠'를 구입한 일이다.
이게 어쩌다가 인생 업적 중 하나로 꼽을 정도가 되었는가 하면.
미니멀라이프 10년째, 이전까지 내 옷장에는 '반팔'이라는 옷이 몇 벌 있지 않았다. 선택과 집중의 영역에서 <반팔옷>을 빼기로 한 것이다.
아침에 자동차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출근, 하루 종일 에어컨을 쐬고 나면 또 에어컨바람을 쐬고 퇴근하고 주말에는 지쳐서 실신. 예쁜 반팔 블라우스는 어두운 옷장 속에서 '그럼 내년을 기약할게' 말하는 듯했다.
여름이라도 출근복은 얇은 긴 팔 셔츠가 전부였다.
혹여나 누군가의 결혼식에 초대받게 된다면 입을 일이 생기지 않을까?
안타깝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미련 없이 태 좋은 반팔블라우스들을 고이 접어 아름다운 가게에 기증했다. 복직 후 첫 출근을 상상하며 구입했던 블라우스인데, 아이를 낳으면서 기억력도 날아간 건지 사무실의 에어컨 바람을 생각 못 했던 거다.
그렇게 반팔 없는 여름을 몇 해 나고 난 뒤에야 둘째의 탄생과 함께, 나는 에어컨 바람 없는 여름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옷장에 반팔티라고는 딱 3벌뿐이었다. 쇼핑이 필요한 순간이 온 것이다.
그 순간, 어느 절약유튜버의 영상이 생각났다. "여름에는 기능성 티셔츠만 입어요. 손빨래해도 금방 마르거든요."
땀을 빨리 식혀준다는 말 보다, '빨래가 금방 마른다'는 평이 마음에 더 쏙 들어왔다. 그 길로 백화점, 아웃렛, 쇼핑몰들을 돌아다녔다.
기능성 티셔츠를 처음 구입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이런 간단한 티셔츠에는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프린팅도, 프릴 달린 넥카라도 없으니 '옷태'가 참으로 중요했다. 내 몸뚱이에 알맞은 공산품을 고르기 위해 수십 벌을 입었다가 벗었다 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2023년 여름, 네파의 까만색 기능성 티셔츠를 구입하게 되었다.
폴리에스터 100%
손세탁 30도
드라이 금지
건조기 금지
재질 특성 때문인지, 점점 더 더워져오는 여름의 뙤약볕 아래에서 새로운 티셔츠는 아주 빛을 발했다.
특히 간단히 러닝을 하거나 요가를 한 날에는 바람이 조금만 살랑 불어도 땀이 금방 식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다고 몸에 닿는 느낌이 심하게 까끌거린다거나 한 것도 아니었으므로 세탁만 잘하고 난다면 잠옷으로 입어도 손색이 없었다.
이제까지 반팔로 왜 꼭 면티만을 고집했는지 지나온 세월이 좀 아쉬울 정도였다.
사실 평소에는 세탁기로 세탁하고 건조기로 건조해서(라벨케어에는 금지라고는 하지만, 뭐.) 잘 몰랐었던 기능성 티셔츠의 진가는 의외의 곳에서 발휘되었다.
바로 육아와 살림을 하면서 무심코 옷에 튄 물들이 금방 마른다는 점이었다. 옷에 얼룩이 튀어도 물로 얼른 비벼놓고 나면 물자국만 남게 되는데, 그 물자국도 어느새 금방 사라지곤 했다.
'금방 마르거든요~' 과연 그 말이 맞았다. 기능성 티셔츠의 기능에 매료된 나는, 7년 10년 되어 낡아 헤진 면티들을 헌 옷 수거함에 넣고 새로운 기능성 티셔츠를 두 장 더 구매했다.
<금방 마른다>의 진가는 둘째 아이와 함께 한 첫 여행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되었다. 이제까지는 건조기가 있으니 이제 아주 거침없이 의복 미니멀을 하고 있는데, 만약 여행을 일주일 가게 된다면 집에 있는 티셔츠 다 모아서 가도 여행일자보다 턱없이 부족하게 되어버린다.
이럴 땐, 여행지 저녁에 씻고 난 뒤 입었던 옷을 손빨래해서 탁탁 널어놓으면? 아침이면 기가 막히게 말라있다. 3일 여행이든, 일주일 여행이든 기능성 티셔츠 서너 벌만 있어도 문제없는 것이다.
옷을 적게 챙길 수 있다는 것은 여행 짐이 늘어날 일도 없다는 것. 게다가 나는 화장품 미니멀도 하고 있으니 일주일 여행이라고 해도 내 짐은 에코백 하나 분량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참고로 옷 한 벌만 입기엔 춥고, 내복 입기엔 더울 것 같은 간절기에는 맨투맨 안에 입어주면 아주 딱 적절하다.
옷장 잘 보이는 곳에 이 기능성 반팔티를 일 년 내내 걸어두어도 공간이 참 아깝지 않은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