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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신발 올인원

두 얼굴의 슬리퍼, 아니 샌들

by 파슈하


발은 딱 두 개인데 신발은 수십 개... 인 시절은 지났다.


미니멀리스트로 산다는 것은, 물건을 살 때도 고민의 연속이다. 특히 내가 고심해서 고른 하나의 물건이 두 가지 역할을 똑똑히 해 낼 때, 소름이 쫙 끼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작년부터 나의 여름을 책임져 준 녀석이 있으니. 바로 이 슬리퍼다. 아니, 샌들이다. 아니... 둘 다다!



아이 둘과 함께 바닷가로 휴가를 떠났던 2023년의 초가을. 당시 둘째 아이 나이 만 1세 그리고 1개월. 캐리어는 기저귀와 우유팩으로 터져 나가기 직전이었다. 10년 차 미니멀리스트에게도 어쩔 수 없는 순간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경우엔 바로 이때였다.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편은 "여기 놀러 가는 사람들 다들 아쿠아슈즈를 신는대!" 하면서 바로 아쿠아슈즈를 구입했다. 부피 얼마 안 하잖아, 하며 아이의 아쿠아슈즈도 구입했다(결국 아이는 불편하다고 한 번밖에 그 신발을 신지 않았지만).


그러나 나는 여행지에서 잠깐 신겠다고 신발을 하나 더 늘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냥 평소에 신고 다니던 여름 슬리퍼를 신고 갔는데. 아뿔싸. 파란 하늘에 찰랑이는 바다를 보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맹세컨데, 내 발이 발에 물을 담그게 된 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


찰랑이는, 마침 딱 온도마저도 완벽했던 바닷물은 그렇게 내 발가락 사이를 간질였고, 슬리퍼는 그 길로 마지막이 되었다. 어쩔 수 없었다. 비즈를 붙잡고 있던 본드가 소금물에 느슨해졌고, 발등을 감싸고 있는 패브릭 부분은 연신 짠물을 토해냈으니. 깨끗하게 세탁한다한들 돌아오지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뒤, 나는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완벽한 신발'을 찾아 나섰다. 아이와 함께 바닷가에서 또 물놀이를 할 수도 있는 것이니 기왕이면 물에 폭삭 젖지 않는 소재였으면 좋겠다. 또, 당시에 족저근막염 판정을 받은 바가 있어 기왕이면 슬리퍼보다는 발을 좀 더 안정적으로 감싸주는 것이면 좋겠다. 그러다가 로켓의 속도로 배송해 준다는 그 쇼핑몰에서 이 슬리퍼, 아니 샌들, 아니 둘 다 되는 이 신발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 슬리퍼(겸 샌들)는 겉보기엔 그냥 평범한 EVA소재 슬리퍼처럼 보이지만, 발등에 있는 줄 하나를 스윽 내리면 바로 샌들로 변신한다. 그야말로 트랜스포머, 변신로봇이 따로 없다.


집 앞에 편의점 갈 때나 재활용품 버리러 갈 때는 슬리퍼 모드, 장 보러 갈 때나 나들이 갈 때는 샌들모드로 변신한다. 물을 흡수하지 않고 잘 마르는 재질이라 물놀이 갈 때도 걱정 없고, 비 오는 날에도 끄떡없다. 무엇보다도, 여행 갈 때는 여분의 신발을 굳이 챙길 필요도 없이, 이거 하나만 신으면 끝난다.


무게도 가벼운데 밑창은 너무 얇지도, 딱딱하지도 않아서 걸을 때마다 내 몸을 잘 지탱해 주는 느낌이다. 세탁은 물을 슥슥 끼얹으면 끝, 건조는 더 쉽다. 솔직히 세상 모든 신발이 이렇게 다기능이면 참 좋으련만. 이 슬리퍼, 아니 샌들, 아니 샌리퍼(?)를 만나고 나서는 여름 신발에 대한 모든 고민 걱정이 싹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이런 류의 신발로 크록스도 유명하다. 편하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고, 평상시는 물론 여행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신발로도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그 구멍 뚫린 디자인에 영 마음이 가지 않는달까. (그래서 아마 크록스를 잘 신으시는 분들은 나의 이 '완벽한 신발을 찾았어!'란 호들갑이 이해가 안 가실 수도 있을 것 같다)






무더운 여름, 아니면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비가 오는 날에도 나는 신발장 앞에서 고민하지 않는다. 오직 내가 고민할 것은 '내릴까 말까', 그러니까 번역하자면 '샌들로 신을까, 슬리퍼로 신을까' 정도랄까. 그냥 이 아이만 있으면 된다. 일은 곱절로 하면서도 신발장에 여유까지 가져다준 물건이라니.



미니멀라이프라는 건 결국 그렇다. 물건은 줄이지만 동시에 삶의 유연함은 늘려주는 것. 필요한 건 그대로 누리면서 귀찮음과 결정 피로를 줄여주는 이런 올인원 아이템은 나의 미니멀라이프에 감초와도 같은 존재다.


하나는 적고 둘은 많다고 느껴지는가? 그럴 땐 이 슬리퍼, 아니 샌들, 아니 둘 다 되는 이런 만능신발 같은 물건을 골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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