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가 11
페기 구겐하임 (1898 ~ 1979)
베니스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은,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의 분관이다. 그녀는 현대미술의 불모지 미국에, 유럽의 근현대 미술과 작가를 소개했다. 미국 현대미술의 토대를 닦았던 불세출의 컬렉터는, 베니스에서 아름다운 생을 살다가 영면했다.
20세기 미술계의 전설적인 컬렉터, 페기 구겐하임. 그녀는 탁월한 안목과 재력을 바탕으로 미국에 유럽의 모더니즘을 이식시켰고, 미술의 중심무대를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기는 역할을 했다.
아버지 벤자민 구겐하임이 타이타닉호 침몰로 사망하고, 그녀는 21세 나이에 엄청난 재산을 상속받았다. 페기는 미국 구리광산으로 큰 부자가 되었던, 솔로몬 구겐하임(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설립자)의 조카였다.
1920년대 그녀는 파리로 건너가 당시 유럽의 화가들과 교류하면서, 미술에 대한 안목을 차츰 넓혔다. 그녀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런던에 화랑을 열어 유럽 미술가의 작품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럽 미술가들이 미국에서 작품세계를 이어갈 수 있도록 지원했다.
뉴욕에도 화랑을 열어 그녀는 잭슨 폴록 같은 무명의 유망주들을 발굴했고, 세계적인 미술가로 발돋움하도록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베니스에 거처를 마련해 자신의 컬렉션들을 전시하며 30여 년을 살았다.
솔로몬 구겐하임 재단을 통해, 뉴욕 맨해튼에 소라모양의 구겐하임 미술관은 1959년에 지어졌다. 이곳은 미국 주재원 시절에 가봤다. 페기가 죽으면서 이 재단에 자신의 컬렉션을 전부 기부함에 따라, 베니스 미술관은 구겐하임 분관(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이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나는 이 미술관을 가족과 이탈리아 여행 중에 관람했다. 운하의 도시 베니스 한 귀퉁이에 자리 잡은 이곳은, 현대미술 거장들의 작품들이 즐비하다.
그녀는 20세기 최고의 컬렉터, 현대미술의 후원자, 배고픈 예술가들의 연인으로 불렸다. 그녀는 알코올 중독자가 술을 구입하듯, 상속받은 재산으로 화가를 부양하는데 돈을 아낌없이 썼다.
현대미술에서 작가 혼자만으로는 예술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작가의 머릿속과 손끝에서 시작된 영감이,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치고 나서야 예술작품이 된다. 훌륭한 작가라도 자신의 진가를 발견해 주는 이가 없다면 관객과 만날 수 없고, 작품은 작업실에 쳐 박혀 있어야만 한다.
이런 작가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바로 아트 컬렉터다. 그들은 진흙 속 진주 같은 작품들을 발굴하고, 공인되지 않은 작가의 가능성만 보고 작품을 사들인다. 아트 컬렉터 때문에 작가는 갤러리에 자신의 작품을 걸고, 작업을 이어갈 기회를 얻는다.
페기는 파리, 런던, 뉴욕에서 유럽과 미국의 현대미술을 양대륙에 전달하는 가교역할을 했다. 당시 컬렉터 가운데서, 그녀와 같은 큰 족적을 남긴 사람은 없다고 한다.
나는 그녀의 미술관을 투어 하면서 유명한 작품들이 보호장치도 없이, 관람객들이 직접 볼 수 있는 것이 잘 이해가 안 되었다. 관람객과 작품과의 거리를 전혀 두지 않았다.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목수로 일하던 알코올 중독자 잭슨 폴록을 그녀가 발견해,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미술가로 만들어냈다.
페기는 미국에서 자신이 재정적 어려움에 처해지자, 뉴욕 구겐하임에 컬렉션을 기부하려 했다. 당시 구겐하임 관장은 전쟁으로 이득을 본 장사꾼의 작품이라고, 그녀를 평가절하하며 거절했다고 한다. 당시 관장은, 미술을 공부한 적이 없는 페기의 안목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그녀는 1948년 자신의 컬렉션을 베니스 비엔날레에 전시하고, 일부 작품은 세계 여러 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런 활동 덕분에, 미국의 화가들이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녀는 베니스에서 18세기의 저택을 구입해 미술관을 차렸다. 미술관 마당 페기의 무덤 옆에는, 생전에 그녀가 사랑했던 14마리의 강아지들도 함께 잠들어 있다.
Change Place, Change Time, Change Think, Change Future. 장소를 바꾸고 시간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면 미래가 바뀔 것이다. 이곳의 또 다른 명품은, 바로 이 문장을 담은 네온사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페기가 우리에게 자기 삶의 긴 여정을, 이 한 문장으로 짧게 이야기해 주는 듯하다.
2022년 베니스 비엔날레의 웅장한 스케일을 마주했던 것과, 구겐하임 베니스 분관에서 페기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 멋진 추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