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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포국수 Sep 02. 2024

내만사 - 이중섭

미술가 14

이중섭 (1916 ~ 1956)

가족을 모두 일본에 보내 놓고, 그는 병원에서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했다. 다시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막노동을 하면서, 미친 듯이 소 그림을 그렸다. 담배 피우는 그의 모습이 애처롭게 다가온다. 그가 좀 더 일찍 세상에서 각광받았더라면…




우리나라 근현대 비운의 천재 미술가 이중섭은, 39세의 나이에 이 세상을 등졌다. 생전에 그의 작품은 인정받지 못하다가 사후 고가의 그림으로 거래되면서, 빈센트 반 고흐와 자주 비교된다. 고흐가 탄광지역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운 가정생활을 했던 것에 비해, 그는 평안남도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생활을 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유학 가서 그림을 공부했고, 아내 마사코를 만났다. 해방과 6.25 전쟁을 거치면서 모든 재산을 잃고 피난 내려와서, 경제적인 어려움과 건강을 잃게 되면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사후 지인들의 노력으로 1970년부터 작품이 집중 발굴되었고, 1990년대 이후에는 박수근과 함께 우리나라의 국민화가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 같다. 일본 유학시절에 그는 학교의 인기 스타였다. 아내 마사코도 일본의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다. 그는 1943년 원산에서 전람회를 준비 중이었는데, 마사코가 결혼 승낙을 받고 원산에 도착했다.


1945년 둘은 결혼했으며, ‘남쪽에서 온 덕이 있는 여인’이라는 의미로 ‘이남덕’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광복이 되었지만 북한 체제에서 6.25 전쟁이 일어났고, 이중섭 가족은 흥남 철수 때 자신의 작품을 모친에게 맡기고 부산에 왔다. 이후 피난민의 소개령에 따라, 그의 가족들은 제주도 서귀포로 갔다.


가족들(아내, 아들 둘)은 그곳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를 보냈다. 1952년 장인이 죽자, 그는 마음을 먹고 가족을 모두 일본에 보냈다. 1953년 천신만고 끝에 오사카에서 꿈에 그리던 가족들과 일주일을 보내고, 홀로 한국에 돌아왔다.


이때부터 그는 가족과 다시 만나기 위해 돈을 벌겠다고 작정하고, 막노동을 하면서 그림을 쏟아냈다. 1953년 황소, 1954년 흰 소 등 그의 대표작들과 삽화들이 이때 많이 나왔다. 어려운 경제생활과 건강 문제로 결국, 그는 무연고자로 쓸쓸히 생을 마쳤다.


제주도에서 행복했던 가족 그림을 그렸던 이중섭은, 재료 값이 없어 담뱃갑의 은박지에 특이한 그림을 남겼다. 그의 작품들은 국립중앙박물관(故 이건희 회장이 이중섭의 진품 90점을 기증) 등에서 볼 수 있다. 가족과 소를 모티브로 그림을 그리다가, 쓸쓸히 요절했던 그가 많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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