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알람이 울린다. 벌써 세 번째 울리는 알람. 5분마다 울리는 요란한 알람 소리에 침대에서 꾸물꾸물 기어 나왔다. 지금 일어나도 지각 확정. 서둘러야 하는데 몸은 천근만근, 눈은 퉁퉁부어서 잘 떠지지도 않는다. 머리를 감을까 말까. 늦었으니 고마 그냥 가자. 얼굴에 물을 묻힌 듯 만 듯 고양이 세수를 하고, 손에 잡히는 티셔츠와 바지를 낑낑거리며 입었다. 누가 날 예쁘게 봐줄 사람도 없으니 화장도 생략. 대충 걸친 코트가 헐겁게 늘어져서 허리끈이 바닥에 질질 끌린다. 온 동네 청소를 내가 다 하게 생겼다.
부지런하기도 하지. 남편이 새벽같이 출근하는 길에 깎아 둔 뽀얀 사과 한 조각을 입에 넣어 와그작 씹었다. 뺨을 톡톡 쳐서 아직 남아있는 잠을 털어낸다. 정신 차려! 돈 벌어야지! 터덜터덜 지하주차장으로 향하다 문득 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었다. 허전한 기분에 핸드백과 노트북 가방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없다. 이런, 휴대폰이 어디 갔지? 찬 공기를 맞은 뺨은 발갛게 물들었고, 숨은 턱까지 차올라 헉헉 댄다. 침대 사이사이를 손으로 더듬으며 숨어있던 휴대폰을 낚아채고, 다시 후다닥 내달린다. 신발이 벗겨 질랑말랑 위태롭다. 오늘도 아침부터 작은 드라마 한 편이다.
몇 해 전, 우연히 스친 한 광고는 내 마음을 어찌 이리도 잘 담아두었을까.
아이들은 알까. 선생님도 똑같이 학교에 가기 싫다는 걸.
달력에 연휴가 몇 개인지 세어보고, 방학 날짜에 빨간 동그라미를 친다.
'교사'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결국 여느 '직장인'과 다를 바 없다.
나는 잘 웃는 선생님이(었)다.
"아이들 기선제압하려면, 웃으면 안 돼. 잘 웃잖아? 그럼 애들은 날 우습게 봐."
교직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들었던 선배 선생님의 조언. 근데, 안 웃는 거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요? 난 그냥 웃으렵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잖아요.
별거 아닌 작은 사탕 하나를 받으려고, 무려 사춘기를 겪고 있는 그들이 손을 번쩍번쩍 들고 서로 발표를 하겠다고 난리를 친다. 반별 대항전이 있는 날은 목숨이라도 걸 기세로 온 힘을 다해 경기에 임한다. 스승의 날에는 온 칠판 가득 내 이름과 함께 감사의 하트가 날아든다. 끝내 안 웃을 수가 없었다. 그땐, 그냥 아이들만 보였다. 초롱초롱 빛나는 눈을 가진 아이들을 바라보며 교단에 선 내 모습이 그때만큼은 무척 마음에 들었다.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가고. 벌써 십수 년이 흘러버렸다. 처음 가졌던 선명하고 빛나던 마음은 색이 바래면서 그 빛도 잃었다. 업무는 해가 갈수록 많아졌지만, 내 월급은 제자리. 하루에 같은 말을 많을 때는 10번도 넘게 해야 할 때도 있다. 이럴 거면 녹음기를 하나 가지고 다닐 걸 그랬다.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까진 아니더라도 꽤나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가졌었는데 이제는 굵고 거칠어진 내 목소리.
업무는 또 왜 이리 많은 걸까. 계획서며 보고서만 써도 하루가 다 갈 것 같은데, 중간중간 학생들이 찾아와 업무를 방해한다. 기초학력이 부족한 학생들을 지도하느라 점심시간도 쉴 수 없다. 숨 돌릴 틈도 없이 학부모님 전화를 받는다. 30분씩 이어지는 하소연 끝에야 겨우 전화기를 내려놓을 수 있다.
지쳤다. 싸우는 애들 말리는 것도, 분리수거하라고 소리 지르는 일도, 여학생들 다툼에 새우등이 터지는 것도, 내 뒤에서 욕을 하는 아이들을 불러 바른말 고운 말을 가르치는 것도.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버린 느낌.
문득, 교무실 내 책상 서랍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의 반성문 사이사이 끼워진 메모, 색 바랜 분필 케이스, 아껴 먹으려 넣어둔 달달한 간식들, 내 마음을 이 자리에 붙잡아 둔 아이들의 사소한 선물들까지. 서랍 속을 정리하다 보니 어느 하나 사연이 없는 물건들이 없다. 힘들었지만 피식 웃게 되는 장면들, 버겁다가도 마음이 놓이던 순간들. 그 모든 순간들이 이 작은 서랍 속에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단순한 수납공간인 줄 알았던 서랍이 사실 교사로서 버텨낸 하루의 기록장이었고, 웃음과 한숨이 함께 담긴 작은 타임캡슐이었다.
비어버렸던 마음에 서랍 속 작은 조각들이 하나 둘 들어와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서랍 속에 갇힌 이 이야기들을 글로 꺼내 두기로 했습니다.
18년 교직 생활에서 건져 올린 이 에피소드들은 특별한 교사 이야기라기보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아, 나도 이런 적 있어” 하고 웃어넘길 수 있는 보통의 기록입니다. 우리 모두 작은 간식 하나, 엉뚱한 대화 하나로 오늘을 버티고, 웃고 또 다른 하루를 시작하니까요.
이 글을 읽다 보면 마치 누군가의 서랍을 하나 열어본 듯, 일상 속 반짝이는 웃음과 공감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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