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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지친 날의 기록

매일 흔들리지만, 매일 다시 문을 여는 교사의 하루

by 솔아

아직 수업은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피곤하다. 출근했는데, 퇴근하고 싶다.

여긴 도대체 어디일까. 시장바닥이 따로 없다. 종이 울렸을 텐데, 이 소란 속에선 다 묻혀버린다. 내가 교실에 들어선 걸 알아챈 몇몇 눈치 빠른 녀석들은 기민하게 책상 사이를 통과한다. 중간에 '퍽!' 소리가 들리지만 아픈 부위를 문지를지언정 동작을 멈추지는 않는다. 교실이 고요해지기를 기다리는 데에는 짧으면 몇 초, 길면 몇 분이 걸린다. 오늘은 양호하네. 칼칼한 목에 소리가 걸려 나오지 않는다. 대충 눈으로 교실을 훑어 빈자리 수를 센다. 전원 출석. 내가 눈을 돌릴 때마다 빳빳하던 고개를 푹 수그린다. 왜! 뭐! 내가 뭘 어쨌는데! 발표 안 시킨다고!

연습 문제 풀이를 시킨 후, 교실을 한 바퀴 느긋하게 걷는다. 중간중간, 버려진 쓰레기, 창가에 아무렇게나 놓인 실내화 같은 것들은 그냥 흐린 눈으로 넘겨버린다. 불금에 잔소리 따위로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오늘은 그냥 조용히 지나가길 바랐다.

친구에게 지우개를 빌리기 위해 손을 뻗던 현석이의 텀블러가 팔꿈치에 맞아 바닥으로 구른다. 이 소리가 신호탄이 되어 숨죽이던 아이들 입에서 '풋!' 웃음소리가 번진다. 가만히 교탁을 두어 번 두드리는 것으로 상황은 종료되었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 이제 정말 그 정도 레벨은 된 모양이다. 눈빛으로 의사전달이 가능한. 오늘 수업도 그럭저럭 잘 지나갔다. 이미 십수 년 몸담고 있는 직장이다. 속마음이 어쨌든, 베테랑답게 학습 내용이 청산유수처럼 내 입을 타고 흘러나온다. 문제는 흘러나와 학생들 귀로 들어가 뇌에 박혀야 되는데, 몇몇 아이들의 다른 쪽 귀로 다시 흘러나오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는 것이다. 또 딴생각 중이구만.

ChatGPT Image 2025년 10월 8일 오후 06_39_32.png

수업 끝! 교무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바쁘지만, 복도가 월요일 오전 꽉 막힌 도로 같다. 심지어 나보다 키도 큰 애들은 왜 이리 많은 건가. 나도 좀 가자, 얘들아. 인상이 찌푸려진다. "걸을 땐 사뿐사뿐, 우측통행"이라고 쓰인 배너는 영 무용지물이다.

겨우 도착해 앉은 창가 쪽 교무실 내 책상은 내 마음처럼 어수선하다. 교무실도 이미 학생들에게 점령당했다. 아파서 조퇴를 희망하는 아이들, 복도에서 장난치다가 걸려 들어와 억울함을 호소하는 아이들(얘들은 매일 불려 오는데, 매일 억울해한다.), 다음 시간을 준비하러 온 학습 도우미들까지 북적북적. '조금 쉬었다 다음 시간 수업을 가야지' 했더니만, 내내 들려오는 소음 때문에 의자에 앉아서도 편히 쉴 수가 없다.

급격히 떨어지는 혈당. 발표 잘하는 아이들 주려고 사 두었던 간식은 내가 더 많이 먹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발표를 제일 잘하니까 먹어도 되는 거 아닌가?) 다음 시간은 좀 시끄럽긴 해도 귀여운 10반 수업이다. 개그 코드가 잘 맞아서 티키타카가 잘 맞는 반 수업은 나도 덩달아 신이 난다. 들어가기 전부터 오늘은 어떤 말로 날 웃길지 기대된다.

그런데, 오늘은 그런 날인가 보다. 뭘 해도 기분이 상하고 뭐든 심기에 거슬리는 그런 날.

'ㅈ'은 이 반에서 제일 키가 커서 전방 100미터 밖에서도 또렷이 보이는 학생이다. 1학년 때는 우리 반 귀요미로, 주로 학생들 텐션이 떨어졌을 때 흥을 돋우는 역할을 했고, 3학년이 되어서는 교과 시간에만 만나지만 옛정이 있어서 그런지 큰 키에도 불구하고 내 눈에는 마냥 귀엽기만 하다. 근데, 그 귀요미가 아주 대놓고 수업 시간에 딴짓 중이다. 영어 책 밑에 몰래 뭔가를 숨겨두고 쓰고 있는 게 뻔히 보인다. 저 덩치에 저게 안 보일 거라 생각했다니. 한 5분 기다려줬다. 스스로 집어넣도록. 근데 눈치도 없이 계속 쓴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공통수학 1이라고 적힌 문제집이다.

그래. 외고 가고 싶다는 애니까 내 수업은 뭐, 안 들어도 다 안다는 건가. 그래도 이건 진짜 아니다. 너와 나 사이에 수학이 끼어들다니. 우리가 겨우 이 정도 사이밖에 안 되는 거였니? 그 문제집을 가져와버렸다. 곱게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없다. 수업이 끝나고 나에게 와서 제발 돌려달라고 통사정이다. 일주일 뒤에 찾으러 오라고 했다. 오늘까지 숙제라고 한다. 그럼 미리 좀 해두던가. 학원 숙제는 저렇게 열심히 한다. 일부러 돌려주지 않았다. 학원서 복사를 해주든 뭘 하든 하겠지 뭐, 알아서 해보라지. 심술궂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와 짜증을 부렸지만, 축 처진 어깨로 교무실을 나가는 'ㅈ'을 보니 또 마음이 흔들린다. 종례 시간에 담임선생님을 통해서 돌려줘야겠다.


다시 종이 울리고, 복도가 조용해졌다. 커피라도 한 모금 마시고 마음을 가라앉히면 나을까?

컵을 엎질렀다. 교무실 바닥엔 지도안이 반쯤 젖고, 하필 오늘 나는 흰 블라우스를 입었다. 옆자리 선생님이 슬며시 휴지를 내민다.


“오늘 기분이 별로죠?”


그 한마디에 웃음이 터진다. 아무렇지 않게 건넨 그 말이 오늘따라 괜히 따뜻하게 박힌다. 다시 컵에 커피를 따라주는 선생님의 손길이 너무 고마워서 눈이 점점 뜨끈해진다. 울면 안 돼! 웃다가 울다가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잖아. 내 마음을 알아주는 건 역시 같이 하루 종일 아이들에게 함께 휘둘리고, 웃고 우는 선생님들 뿐이다. 커피 한 모금과 함께 오늘의 짜증도 삼켜버렸다.


가끔은 그런 날도 있다. 선생님도 사람이니까 늘 좋은 날만 있을 수는 없겠지. 화내고 후회하고, 웃다가 또 울 뻔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종소리를 들으면 또 걸음을 옮기고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 아이들과 눈을 맞추며 수업을 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렇게 되고 만다.

그게 내 일이고, 나의 하루니까.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이 공간 안에서 나도 함께 배우고 성장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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