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자리 바꾸는 날

한 달의 운명이 오늘 내 손끝에서 결정된다

by 솔아

웬일인지 아이들의 눈빛이 아침부터 초롱초롱하다. 아침 조회를 위해 들어선 교실의 공기가 다른 날과는 다르다. 묘하게 설렘이 느껴진다고나 해야 할까. 어둠의 자식들 마냥 내가 교실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불도 켜지 않고 책상에 엎드려 축 늘어져 있던 녀석들이 오늘은 기대 어린 눈빛을 나에게 보내고 있다. 아, 이 낯선 눈빛. 부담스럽게 왜 저러지?


"선생님! 오늘 자리 바꾸는 날이죠?"


이거였구나. 한 달에 한 번 돌아오는 자리 바꾸는 날.

우리 반은 지정좌석제를 운영한다. 대부분의 다른 반들도 마찬가지. 여러 가지 문제로 나는 좌석에 대한 자유 선택권은 부여하지 않는다. 친한 친구들끼리 앉으려 이른 아침부터 학교에 등교해서 좋은 위치(주로 뒷자리이다)를 선점하려는 학생들이 있는가 하면, 그 사이에서 소외감을 느끼는 아이들도 있다. 수업 시간에도 친한 친구들끼리 앉다 보면 수업의 흐름을 방해하는 경우가 많다. 학급의 질서가 깨어지고 만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좌석 배치를 도와주는 각종 앱들이 존재한다. 좌석배치 앱은 학생들의 수를 입력하면 랜덤으로 자리를 배치해 준다. 쉽고 간편하고 빠르다. 그런데, 이 앱에는 학생들은 모르는 비밀이 한 가지 숨어 있다. (이 글을 읽는 학부모님들, 학생들의 평화로운 학교 생활을 위해 부디 이 사실을 학생들에게 알리지 말아 주세요.) 앱을 실행하기 전, 미리 좌석을 세팅할 수 있다. 함께 앉았을 때 장난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는 아이들을 분리하고, 교과 시간 중 원활한 조별 활동을 위해 성적 분포를 적절히 섞어 배치가 가능하도록 한다. 서로 사이가 너무 좋아도 분리, 너무 껄끄러워도 거리를 두어야 한다. 아이들의 눈에는 모든 것이 랜덤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그 우연은 철저히 계산된 결과물이다.


처음 한 달간은 학생들의 이름을 외워야 한다는 명목으로 번호 순서대로 자리를 배치했다.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 학생들은 언제 자리를 바꾸냐며 아우성쳤지만, 한 달을 꿋꿋이 버텼고 드디어 자리를 바꾸는 그날이 왔다. 올해 나의 선택은 앱이 아니다. 동그란 사탕 통에 일명 '아이스크림 막대'를 준비했다. 디지털 시대를 거스르는 아날로그 방식을 택했다. 그 막대기의 끝에는 1번에서 28번까지의 숫자가 쓰여있다. 좌석에 번호를 부여하고, 해당 번호를 뽑은 학생이 그 좌석에 한 달간 앉게 된다는 룰을 정했다. (민주적인 절차를 거쳐 아이들과 함께 정하고 싶었지만, 회의 시작과 동시에 말다툼이 일어난 관계로, 우리 반은 1인 독재 체제가 되었다. 물론,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는 나의 차지.)


앱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 앱을 사용하면 정말 쉽고 빠르게 (내가 원하는 대로) 학급의 좌석을 구성할 수 있다. 하지만 만족스럽지 않은 자리를 배정받은 학생들의 불만의 목소리까지 막을 수는 없다. 눈물이 맺힌 눈으로 자리를 옮겨달라는 학생, 모니터가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하소연하는 학생, 친한 친구와 떨어졌다고 투정 부리는 학생까지. 매달 자리를 바꾸는 날이 돌아오면 쉬는 시간마다 찾아오는 학생들로 민원이 폭주한다. 눈치 빠른 녀석들은 앱의 자리 배정 결과를 믿지 못 하고, 내가 혹시 조작한 건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다시 한 번 앱을 가동해주길 원하기도 한다.(뜨끔하지만, 이미 시침을 뚝 떼는 표정 연기는 여배우 뺨을 친다.) 민원을 해결해주고 싶지만, 한 명 자리를 옮기고 나면 나머지 스무명 이상의 학생들 모두 원하는 자리로 이동해야만 불만이 없어진다.


"자, 한 사람씩 나와서 막대기를 하나씩 뽑는 거야. 이건 누구도 원망할 수 없어, 알지? 그 번호를 뽑은 너의 손만이 원망의 대상이야. 뒤쪽 자리에 앉아서 칠판이 잘 안 보인다면 안경이 정답이야. 한 번 정해지면 한 달간 그 자리가 나의 자리 고정! 선생님의 허락 없이 교과 시간에 마음대로 자리를 옮기는 경우엔 벌점으로 엄히 다스릴 계획이니 그리 알고 있도록. 다들 알겠죠?"


불만 접수 및 AS는 없다는 점, 미리 고객님들께 공지 완료.

고개를 끄덕인 학생들이 하나씩 나와 떨리는 손으로 막대를 뽑는다. 한 달의 명운이 이 막대기에 달린 것처럼 눈빛에 비장함이 묻어난다. 그럭저럭 괜찮은 자리를 뽑은 학생들의 환호와 별로(?)인 자리를 뽑은 학생들의 탄식이 엇갈린다.


"선생님, 제발 한 번만 더요..."

귀엽지만, 안 된다. 모두에게 기회는 공평하다.


드르르륵, 책상과 의자가 움직이고, 교실은 순식간에 분주해진다. 교실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한 달 동안 익숙해진 아이들 얼굴이 자리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또 낯설다. 교실이 새로워졌다.

교실의 좌석은 바뀌었지만 불만도, 웃음도, 그리고 몰래 자리 바꾸는 시도(?)도 어김없이 이어진다. 누군가는 전보다 조금 앞자리로, 누군가는 창가 쪽으로, 누군가는 마음에 안 드는 자리로 이동했지만 결국 하루이틀 지나면 다들 그 자리에서 웃고 떠들고 있을 테다. 교실이라는 작은 세상은, 자리가 바뀌어도 언제나 시끌벅적하고 살아있다. 다음 자리 바꾸는 날엔 또 어떤 드라마가 펼쳐질까.




솔아 작가의 책을 만나보세요!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53504767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7510826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