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가지 사건들을 겪으며 나는 멕시코 캄페체 생활에 점차 적응하고 있었다. 살인적이라 느껴졌던 더위도 이제는 그럭저럭 참을 만해졌고, 스페인어 실력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으며 한국의 편리한 시스템과 비교하며 불평하는 날이 더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보다는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있었다.
느긋하고 친절한 멕시코 사람들의 여유로움이 때로는 사랑스럽다고 느끼기까지 하며, 나는 그렇게 그들의 문화에 조금씩 녹아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회사 소식을 전해왔다. 현재 남편이 관리하고 있는 농장에 새로운 한국인 관리자가 파견될 예정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새로운 한국 가족이 온다는 사실에 내심 반가운 마음과 함께, 어쩌면 이전의 나처럼 정착에 어려움을 겪을지도 모를 그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스쳤다.
남편은 자신의 ‘소울메이트’나 다름없는 알렉스를 당분간 그 새로운 관리자가 정착할 때까지 지원 인력으로 보내줘야 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이어지는 소식은 내 마음에 예상치 못한 파문을 일으켰다. 그 새로운 관리자는 남편분만 캄페체에 상주하고, 그의 아내와 아이들은 캄페체에서 두 시간 거리인 메리다(Mérida)에 정착하여 그곳의 사립학교에 다닐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설명하기 힘든 어떤 위화감, 혹은 부러움과 비슷한 감정에 휩싸였다. 아이들 교육 환경이나 도시의 편의시설(단적인 예로 스타벅스만 해도 캄페체에는 단 하나였지만, 메리다에는 수십 개가 있었다) 면에서 메리다가 캄페체보다 더 나아 보였던 것이 사실이었고 내가 생각해보지 못했던 꽤 현명해 보이는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무의식 중에 나의 상황과 그들의 선택을 비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 복잡한 감정의 화살을 또다시 가장 만만한 나의 남편에게로 돌리기 시작했다. "나는 이렇게 덥고 불편한 곳에서 애들 밥 해 먹이고 온갖 집안일 하느라 힘든데, 우리 애들은 제대로 된 교육도 못 받는 것 같고, 당신이나 나나 이 회사에서 좋은 대우를 받는 것 같지도 않아! 이게 다 뭐야, 너무 슬퍼! 내가 왜 여기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 나는 그야말로 ‘죽어라’ 원망을 쏟아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그때의 내가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지만, 당시에는 힘들다고 말하는걸 알아주거나 곧감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더 커서 발악을 한 것 같다. 다행히 시간이 지난 지금 난 그때의 나를 반성하고 있는 중이다.)
왜 나는 항상 내가 가진 것들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현실에 감사하지 못하는 것일까. 내가 누리고 있는 이 환경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꿈같은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왜 나는 항상 불평하고 안 좋은 점만 찾아내려 애쓰는 것일까. 왜 나는 한국에서도 그렇고 여기 멕시코에서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이렇게 나와 내 남편 내 가족을 힘들게 하는걸까..? 참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돌이켜보면 한국에 있을 때도 겉으로는 아닌 척했지만, 내가 사는 동네는 항상 별로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사는 동네는 더 근사해 보였으며 비교하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모든 걸 비교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었다. 무던한척 애를 쓰긴 했지만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것 같은 사람들을 보면 솔직히 배도 아프고 속이 상했다. 솔직히 나는 명품 가방이나 비싼 자동차등에는 별다른 욕심이 없고 지금도 그렇다, 대신 일 년에 한 번 정도 해외여행을 가는 것에 많은 욕심을 부리고, 모아둔 돈을 가방이나 옷가지에 쓰는 건 너무 아까워도 비행기표에 쓰는 건 하나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멕시코에서의 생활은 어쩌면 나에게 딱 맞는 옷이었을지도 모른다. 한국 식재료를 구하기 위해서든, 타국에서의 새로운 경험을 위해서든, 우리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꽤 자주 여행을 다녀야 했으니까.
어쩌면 나는 그 끝없는 이동과 새로운 발견의 연속인 이 생활에 이미 흠뻑 젖어들어 그 자체를 즐기고 있었으면서도, 결국에는 그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현재 가지고 있는 거에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고 마치 다른 사람 손에 들린 떡이 더 커 보여 그걸 달라고 떼를 쓰는 어린아이처럼, 나는 남편을 힘들게 하고 있었다.
남편은 나보다 한국에서보다 더 나은 삶을 사는 것처럼 내 눈에는 비쳤다. 아침 일곱 시 반이면 회사에서 제공해 준 차를 직접 운전하여 큰아이를 학교에 내려다 주고, 이런저런 농장 일을 처리한 뒤 오후 네 시 반이면 어김없이 집에 돌아와 큰아이의 영어 학원이나 스페인어 학원 셔틀을 자처했다.
(어리석게도) 나는 그런 남편의 일상이 나보다 훨씬 덜 힘들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는 매일 새벽 여섯 시 사십 분쯤 만원 버스에 몸을 싣고 두 시간을 넘게 달려 회사에 가고, 집에 돌아오면 저녁 여덟 시가 다 되던 고된 삶을 살았던 그였기에 멕시코에서 그의 삶은 표면적으로는 나아 보였다.
그래서 나는 이 살인적인 더위 속에서 뜨거운 불 앞에 서서 하루 세끼 밥을 하고, 매일 세탁기를 돌리고 이층 베란다까지 낑낑대며 빨래를 들고 올라가 널어야 하는 나의 일상이 너무나 억울하게 느껴졌다.
가끔씩 떠나는 메리다 여행이나 디나와의 브런치가 유일한 힐링이었지만, 그것마저도 ‘현실의 고통’이라는 자기 연민에 너무 깊이 몰입했던 나에게는 금세 잊히는 순간일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나의 힘듦에만 집중하느라, 정작 남편이 회사에서 어떤 고민을 안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우리가 캄페체에 오기로 결정했을 때, 남편은 회사 중역이 지나가듯 했던 말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 멕시코에서 3년에서 5년 정도 경험을 쌓으면 미국에 있는 법인으로 옮겨갈 기회가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우리는 미국에서 아이들을 키우면 한국의 치열한 교육 시스템에서 벗어나 조금 더 자유롭게 아이들을 키울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나 역시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멕시코에서 잘 버티면 언젠가는 미국으로 넘어갈 수 있을 거라는 환상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건 구체적인 계획 없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말이었고, 우리가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며 희망을 키웠던 것은 아니었나 싶다.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그 무렵 남편은 새로 오는 한국인 관리자가 캄페체에 정착하게 되면 자신의 미국행 가능성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사장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고 한다. 하지만 사장은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명확한 대답을 피했고, 남편은 그 과정에서 적잖이 힘들어하고 있었다.
게다가 남편 역시 회사 조직 내에서 자신의 역할과 미래에 대해 고민이 깊어지고 있었다. 농장을 관리하는 일이 장기적으로 자신의 커리어에 어떤 도움이 될 것인지, 미국으로 갈 수는 있을 것인지,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그는 홀로 불안감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나의 끊임없는 불평과 원망이 얼마나 큰 짐을 더했을까. 나는 그때,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