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결국 회사라는 큰 배의 입장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작은 조각배 같은 존재였다. 그 어떤 것도 우리 스스로 온전히 장담할 수 없었고, 함부로 결정할 수도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정해진 시간을 보내며 일상을 살아내야 했고, 그 과정에서 남편과 나의 다툼은 눈에 띄게 잦아졌다.
낯선 외국 생활에 대한 어설픈 낭만 따위는 진작에 눈곱만큼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냉혹한 현실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 도시에서 한국말로 속 시원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남편뿐이었는데, 안 그래도 회사 일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그의 그릇 역시 넘쳐나고 있었던지, 나의 이런저런 고충과 투정을 제대로 이해하고 보듬어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쩌면 그에게도 나를 받아줄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속에서 켜켜이 쌓여가는 감정의 응어리를 좀 봐달라고, 알아달라고 나름의 방식으로 소리치고 하소연했지만, 매일같이 이어지는 나의 불평에 지친 남편의 눈에는 그저 맨날 투정이나 부리는 못된 아내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이즈음 나의 유튜브 알고리즘에는 심심찮게 이혼에 관련된 동영상들이 뜨기 시작했고, 나 역시 브런치에 접속해 온갖 이혼 관련 글들을 찾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날이 늘어갔다. 어쩌면 이것이 내 미래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공포와 함께,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서 기묘한 위안을 동시에 느꼈다.
머리로는 ‘마음공부’니 ‘내 마음 챙기기’니 하며 모든 상황과 남편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무던히 애썼지만, 현실 속의 나는 통제 불능의 감정에 휩싸여 마치 ‘미친년 꽃다발’처럼 허구한 날 남편에게 가시 돋친 투정만 부리는 어린아이 같았을 것이다.
우리는 원래부터도 사소한 일로 다투기도 잘했지만, 이렇게까지 관계가 힘들었던 적은 없었다. 만약 한국에 있었다면, 답답한 마음에 누군가에게 조언을 구하거나, 가까운 친구나 가족에게 따끔한 질책을 들어가며 나 자신을 다잡을 기회라도 있었을 것이다. 혹은 다른 무언가로 시선을 돌려 이 문제에 덜 집중하는 방식으로 잠시 회피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이곳 캄페체에서 나의 세상은 오로지 ‘까사 블랑카’라는 한정된 공간과 그 안의 한국인 가족뿐이었으니, 남편과 부딪히는 일은 점점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어떤 날은 거짓말처럼 모든 것이 괜찮아졌다가도, 또 어떤 날은 사소한 일 하나에 모든 것이 무너지며 미칠 것 같은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남편은 금요일이나 토요일이 되면 작은아이와 함께 몰에있는 보스턴 피자에서 맥주와 피자를 먹기도 했고, 같이 장을 보며 평범하게 일상을 공유하고 있었다. 마치 아무런 일이 없는것처럼 보였지만 그야말로 내 속이 내 속이 아니었다.
아이들의 겨울 학기가 끝나면 잠시 한국에 다녀올 계획이 잡혀 있었다. 하지만 그 계획이 있다는 사실조차, 당시의 나에게는 큰 위안이 되지 못했다. 나는 항상 마음속 깊은 곳에 남편에 대한, 그리고 어쩌면 나 자신에 대한 불만을 안고 살았던 것 같다.
어쩌면 다가올 한국 방문이 이 모든 답답함과 지긋지긋한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나를 잠시라도 잊게 해 줄 숨통 트이는 시간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이 낯선 땅에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을 고스란히 안고 돌아와 다시 똑같은 절망과 마주하게 될까. 그때의 나는 그저 모든 것이 막막하고 불확실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