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사 블랑카’에서의 생활은 물과의 지긋지긋한 전쟁과 비둘기와의 끊임없는 사투로 요약될 만큼 다사다난했지만, 그 소동 속에서도 나는 나름의 질서를 찾아가고 있었다. 이웃들과 정을 나누고, 아이들 학원을 걸어서 오가는 소소한 일상에 제법 만족감을 느끼며 캄페체에 조금씩 뿌리내리고 있었다.
더위는 여전했고 스페인어는 제자리걸음이었지만, 가끔씩 이웃들과 나누는 유쾌한 수다와 아이들의 웃음소리 속에서 ‘더 이상 큰 변화 없이 이대로만 흘러가도 괜찮겠다’ 싶은 평온함을 느끼던 무렵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디나의 어머니께서 정말 뜻밖의 제안을 해오셨다.
자신이 최근에 구입한 집을 좋은 가격에 세를 놓을 테니 한번 보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디나에게 내가 살고 있는 ‘까사 블랑카’의 문제점들을 이미 여러 번 늘어놓았던 터라, 어머님께서 신경을 써주신 모양이었다. ‘멕시코에서 이사를 한 번 해봤는데, 두 번이라고 못 할까?’ 하는 심정으로, 나는 디나 어머님이 제안한 집을 보러 나섰다.
그 집은 ‘까사 블랑카’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프리바다 단지 안의 작고 아담한 주택이었다. 부엌은 조금 작았지만, 세련되어 보이는 욕실이 두 개나 있었고, 그중 하나에는 욕조까지 있었다! 집의 상태도 전반적으로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 시세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세를 주시겠다는 어머님의 말씀이 가장 솔깃했다. 단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면, 큰아이는 ‘까사 블랑카’ 2층에 샌드백을 설치하고 유튜브를 보며 독학으로 권투를 배우며 스트레스를 풀었는데 이 집은 샌드백을 걸만한 공간이 전혀 나오지가 않았다는 것이다. 그 공간만 있다면 정말 괜찮을것 같은 집이었다.
가격과 집의 컨디션은 너무나 좋았지만, 나는 일단 생각해 보겠다고 말씀드린 후 남편과 상의를 했다. 그런데 남편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그는 자신의 회사 내 상황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정확히 알 수 없다며, 섣불리 새집으로 이사를 가서 오래 살 수 있을지도 의문이라고 했다.
디나 어머님께서 좋은 가격에 집을 내놓으신 것은 우리가 장기적으로 살 것을 염두에 두고 제안한 것일 거라며, 우리의 미래는 아직 불확실하다며 이사를 보류하자는 것이었다. 이사 자체를 보류하는 것은 괜찮았지만, 그 이유가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의 불확실한 태도는 곧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때서야 나는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다. 아, 어쩌면 우리가 멕시코에 머무르는 시간이 생각보다 짧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마 남편은 그 무렵부터 이미 미국이든 한국이든 어디로든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는 이제 이곳 생활에 제법 적응했고, 이 힘든 시기만 잘 버텨내면 아이들도 조금 더 편안하게 공부하며 괜찮은 학교생활을 이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온갖 어려움을 겪어내며 이제야 이곳이 어떻게 돌아가는 곳인지 어렴풋이 파악이 되어가고 있었고, 아이들도 스페인어가 눈에 띄게 늘며 현지 생활에 꽤 잘 적응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이방인으로서의 내 삶이 점점 마음에 들고 있었다. 항상 한 걸음 떨어져 3자 적 관점에서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 나에게는 오히려 심리적인 불안도를 낮춰주었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내가 너무 깊이 관여하며 감정을 소모하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이 있었다. 모든 일에 일일이 의미를 부여하고 상처받기보다는, ‘나는 이방인이니까’ 하는 생각으로 한 걸음 물러서면 마음이 편해질 때가 많았다.
내가 너무 애쓰지 않아도, ‘이방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것들이 용인되는 듯한 느낌, 그것이 때로는 불편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나는 그 안에서 감정적으로 덜 휘둘리며 살아가는 방식이 편안하게 느껴져 가고 있었다.
거기다 남편과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아도, 나에게는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 디나가 있었고, 가끔씩 찾아가는 59번가의 예쁜 레스토랑에서의 외식이나 도시에서 열리는 크고 작은 축제들이 나에게 숨 쉴 공간을 마련해주고 있었다.
그래서 남편이 "우리는 한국을 가던지 미국을 가던지 결정을 확실히 내리지 않으면, 우리는 여기서 5년이고 10년이고 기약 없이 있어야 할지도 몰라"라고 말했을 때, 나는 오히려 "한때는 미국에서의 삶을 막연히 꿈꿨지만, 이제는 그 환상보다 이곳에서의 현실적인 평온함이 더 소중하게 느껴져. 차라리 위험하고 돈 많이 들 것 같은 미국보다 여기가 훨씬 나은 것 같아"라며 그의 마음이 바뀌기를 바라며 설득하려 했다
.
그러던 어느 날, 이곳에 사는 내내 말썽이었던 남편의 회사 차가 또 한 번 길에서 퍼져버렸다. 그 일을 계기로 내가 한동안 기약 없이 남편의 출근길과 퇴근길을 책임지게 되었고, 덕분에 평소에는 각자의 생활에 바빠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했던 우리가 차 안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그 시간들은 결코 편안하지만은 않았다. "그냥 여기서 버티자", "아니다, 역시 떠나야 한다", "당신 마음대로 해", "아니야, 원래 다 힘든 거야" 등등, 항상 반복되는 똑같은 주제의 대화가 차 안을 맴돌았고,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입장 차이만을 확인하며 아슬아슬한 줄다리기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남편 역시 "이제 농장 일이 좀 눈에 보이기 시작하니, 다른 일들도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지 않겠어?"라며 이곳에 남고 싶어 하는 듯한 말을 하다가도, 또 어떤 날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내비치곤 했다. 나는 그런 남편의 모습을 보며, 그 역시 말 못 할 고민이 많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다.
우리는 캄페체에 올 때 남편이 미국 법인으로 옮겨갈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구체적인 계획 없는 희망이었고, 남편은 회사로부터 명확한 답변을 듣지 못한 채 홀로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나의 불평까지 더해졌으니, 그의 어깨는 얼마나 무거웠을까. 나는 그때, 미처 다 헤아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