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야기책 상징 읽기
글 ⸳ 그림 피터 H. 레이놀즈 · 옮긴이 김지효 / 문학동네
작가 피터 H. 레이놀즈
피터 레이놀즈는 캐나다에서 태어났다. 어린이 방송 프로그램이나 교육용 비디오를 기획한다. 어린이들이 그림 그리는 것을 어려워하는 것을 보고 어린이 미술 교육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어린이들에게 “그림은 잘 그리는 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뉴욕타임즈가 발표한 베스트셀러 1위를 여러 번 기록하고, 어린이책과 미디어 작품으로 보더스 오리지널 보이스상, 앤드류 카네기상 등을 수상했다.
직접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작품으로 <별을 따라서> <점> <느끼는 대로> 등이 있고, 베스트셀러 작품에 그림을 그린 <언젠가 너도> <주디 무디> 시리즈가 있다.
작품 줄거리
미술 시간이 끝났는데도 베티는 아무 그림도 그리지 못하고 앉아 있다. 그걸 본 미술 선생님이 일단 뭔가 표시만이라도 해 보라고 격려한다. 베티가 연필을 잡고 도화지 위에 힘껏 내리꽂았더니 선생님이 한참 들여다보고는 싸인을 하라고 하신다.
한 주일 뒤 베티는 자신의 도화지가 금테 액자에 끼워져 선생님 책상 위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 베티는 그것보다 멋진 점을 그릴 수 있다며 처음으로 수채화 물감을 꺼내 수많은 점들을 그리기 시작한다. 온갖 색깔의 점들과 엄청 큰 점, 심지어는 점을 색칠하지 않고도 점을 그려낸다.
얼마 후 학교 미술전시회에서 베티가 그린 점들이 큰 인기를 얻는다. 베티는 자신의 그림을 부러워하는 아이에게, 선생님께 배운 그대로 일단 그리게 하고는 싸인을 하라고 한다.
작품 들여다보기
이 그림책의 제목 ‘점’은 원제 ‘the dot'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가로 세로 20cm 정사각형인 표지에는 한 아이가 긴 막대 끝에 붓을 매달아 커다란 붉은 색의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동그라미 안에 제목 ’점‘이 쓰여 있다. 성별을 알기 어려운 이 아이는, 책의 첫 장을 펼치면 베티(영어로 쓰인 원본에는 Vashti)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비로소 여자 아이라는 걸 알게 된다.
첫 그림은 미술 교실에 혼자 고민스레 앉아 있는 베티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베티는 미술 시간이 끝났는데도 하얀 도화지에 아무것도 그리지 못했다. 베티의 주변은 푸르스름한 색의 원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원의 색깔은 베티의 심리 상태를 암시한다.
미술 선생님이 베티의 빈 도화지를 들여다보더니 이렇게 말씀하신다.
“와! 눈보라 속에 있는 북극곰을 그렸네.”
눈보라 속의 북극곰이라... 온통 흰색뿐인 학생의 빈 도화지를 대하는 선생님의 태도가 놀랍다. “이게 뭐냐?” “그림 안 그리고 뭐 했니?” “한 시간 동안 놀았니?” 등등의 질책이 아니다. 베티가 그림을 안 그린 게 아니라 못 그렸다는 것을 이해하셨다는 말이다.
베티는 선생님의 이 너그러운 유머에도 기분이 풀리지 않는다. 그림을 못 그리는 자신에게 단단히 실망한 상태이니까.
미술 선생님은 이렇게 베티를 격려하신다.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한번 시작해 보렴.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봐.”
문학동네에서 출판한 책(2011)에서는 이렇게 번역해 놓았으나, 원문과 상당한 거리감이 있다. 작가의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여 안타깝다. 이 문장으로 작가가 전하려는 상징적인 메시지가 이 작품의 주제이기 때문이다.
독자에게, 세상의 수많은 베티에게 평생의 지침이 될 수도 있는 이 상징적인 문장의 원문은 이렇다.
"Just make a mark, and see where it takes you."
(일단 뭔가 표시를 해 보렴. 그리고 그것이 너를 어디로 이끌어가는지 두고보렴.)
선생님은 그림을 그리라 하지 않고, 단지 '표시'를 하라고 하신다. 처음부터 그림다운 그림을 그리라고 요구하지 않으신다. 그저 어떤 ’표시‘로 시작하라고 하신다.
베티는 선생님의 격려에 힘입어 연필을 잡고 도화지 위에 힘껏 내리꽂았다.
주위의 배경이, 선생님의 격려를 받아 한껏 '표시'를 하는 베티의 열정을 나타내는 강한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베티의 표정은 매우 비장하다. 그림을 못 그리는 자신에 대해 화가 난 듯도 하다.
선생님은 베티의 도화지를 들고 한참을 살펴보신다. 그리고는 베티에게 싸인을 하라고 하신다. (베티가 연필로 점만 찍은 걸 보고 “장난하냐?”라거나 “이렇게밖에 못하냐?”라고 하실 선생님이 아니란 걸 독자들은 이미 알고 있다.)
교사는 살펴보는 사람이다. 아이들에게 기회를 주고 하나하나 살펴서 찾아내는 사람이다. 아이의 사정 말고도 재능이나 가능성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격려하는 사람이다.
일주일 뒤 미술시간에 베티는 선생님 책상 위에 걸린 액자를 보고 깜짝 놀란다. 자신의 ’점 그림‘이 번쩍거리는 금테 액자 안에 끼워져 걸려 있는 게 아닌가. 순간 저것보다 멋진 점을 그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든 베티는 처음으로 수채화 물감을 꺼내 점들을 그리기 시작한다. 노란 점, 초록 점, 빨간 점, 파란 점, 빨간색과 파란색을 섞은 보라색 점... 쉬지 않고 그린다.
처음 그리기 시작할 때 베티의 주변은 녹색이었다. 그리 큰 열정으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 점점 붉은색으로 변한 배경은 베티의 열정이 활활 타오르고 있음을 표현한다. 베티를 둘러싼 색깔로 그녀의 심리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베티가 점 그리기에 몰입하여 온갖 점을 그린 결과, 이제는 점을 그리지 않고도 점을 그리는 창조성을 발휘한다. 선생님이 말한 바와 같이, 일단 점으로 ‘표시’한 그림이 베티를 무한한 창조의 세계로 이끌어 간 것이다.
학교 전시회에서 베티의 ‘점 그림’은 인기가 대단했다. 베티의 그림을 부러워하며 자기는 선도 제대로 그리지 못한다는 아이에게, 베티는 일단 그려 보게 한 다음 싸인을 하게 한다.
베티는 선생님에게서 받은 것을 다른 아이에게 전수한다. 인생의 가르침은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서 전해 받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며 지속적으로 이어나가는 것이다.
"Just make a mark, and see where it takes you."
이 말은 단지 그림 그리기에만 국한된 말이 아니다. 인생길에서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막막한 사람들에게 건네는 희망의 메시지이다. 여기서의 ‘mark(표시)’는 알지 못하는 세계를 향한 새로운 시도, 두렵고 떨리지만 무겁게 힘껏 내딛는 첫걸음을 상징한다.
작가는 이 작품으로 말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무언가를 시작하면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일단 뭔가를 시도해 보라고. 그리고 그것이 인생을 어디로 어떻게 이끌어갈지 두고보라고.
다시 표지로 돌아가보자. 표지를 가득 채우고 있는 붉은색의 동그라미는 단순한 동그라미가 아니다. 마치 불꽃이 이글거리며 가운데서부터 타오르는 모습이다. 그 안에 ‘점’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는데, 이 동그라미는 결코 점이라 할 수 없다. 베티가 마지못해 연필로 찍은 점에서 출발한 점 그림은 이렇게 화면 가득 붉게 타오르는 커다란 원을 만들어내기까지에 이르렀다.
베티가 처음에 찍은 '점'은 보잘 것 없는 능력이나 처지, 또는 작고 연약한 자아를 상징한다. 그러나 눈에 보일 듯 말 듯한 점의 크기였던 주인공의 자아가 일단 시도를 함으로써 자신도 모르게 끊임없이 확장하여 세상에 가득 차기에 이른 것이다.
그림책 ‘점(the dot)'은 제목, 표지 그림, 배경색, 선생님의 말씀, 하나하나가 다 상징이다. 우리는 모두가 ’점‘에서 출발한다. 출발을 하려면 일단 ’점‘을 찍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