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환할 줄 알고 호주에 왔는데 먹고살 길이 없네?
그 당시, 나는 집에서 버스로 한 시간 반 거리에 있는 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집에서 한 시간 거리인 쇼핑센터에서 일을 나가야 했고 주말에는 차 없이는 갈 수 없는 먼 거리에 장사를 해야 했었다. 그즈음, 한국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온 언니와 함께 열심히 공부하며 일했다.
끝없이 할 일이 있었다. 언니도 비즈니스에 진심이었고 학교도 재밌게 다니면서 매일매일을 고군 분투하며 살았다. 주말장사가 너무 잘돼도 쇼핑센터의 스툴은 장사가 잘 되진 않았었고 그래도 장사가 점차적으로 올라가고 있었기에 실제로 수익이 많지는 않았지만,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할만큼 신났었다.
그런데 같이 일하던 언니는 너무 힘들었다고 말했다. 자기는 그냥 다시 시드니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어느 날 밤, 집 앞 바닷가에 앉아서 한참을 얘기했다.
까만 밤에 멋진 파도 소리에 쏟아질 듯한 별빛 아래에서 언니가 고해성사하듯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시드니에서 힘든 일을 겪다가 안식처처럼 내가 생각나서 찾아왔다고 했다. 남편도 따뜻하게 맞아주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함께 생활해 보니 너무 실망했고 놀랐다고 했다. 본인은 좋은 사람인 줄 알고 나를 소개했는데 이럴 줄 몰랐다고 얘기했다. 매일 술 마시고 무책임하게 나한테 다 떠넘기는 모습이 바보 같아 보였다고 했다. 이 결혼 생활이 정말 괜찮은지, 너는 평생 이런 사람과 살 수 있겠냐고 물었다. 아직 결혼한 지 오래되지 않았으니까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라고 했다. 어리니까 언니랑 시드니로 다시 가서 새로 시작하자고 했다.
정말 깜짝 놀랐다. 맞다, 이 결혼 생활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내가 조금 힘들다고 또 도망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남편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보기 시작했다. 남편은 아들 셋 중 막내였다. 투자 이민으로 호주에 일찍 정착한 이민자 1.5세대였다. 아버지는 2년이 안 돼서 한국으로 돌아가셔서 기러기 생활을 하셨고, 어머니랑 셋의 아들만 호주에 남아 있었다. 그 시대에 어머니는 영어도 한마디 못하시고 아들 셋을 데리고 독하게 버텨내셨다. 그런데 어머니 본인의 삶도 무척 중요하셨던 분이셨다. 단 한 번도 도시락을 싸주시지 않았다고 하시고 학교 매점에서 도시락을 먹게 하셨다고 했다. 하루도 안 빠지고 골프 필드에 나가시고 성당 봉사일을 하셨다고 했다.
그래도 아들들이 최우선이라 어머니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사랑을 주셨던 분이셨다고 하더라. 아들들 셋 다 효자였다.
남편의 어린 시절은 항상 집에 없던 어머니 때문에 끔찍했다고 하더라. 나이 차가 많이 나던 큰형은 일찍 아르바이트를 하며 거의 집에 없었고, 둘째 형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매일 때렸다고 하더라. 시간을 정해두고 때렸다고 하더라. 맞으면서 형을 어떻게 죽일까만 고민했다고 얘기하는데 정말 너무 깜짝 놀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항상 때리던 둘째 형은 15살에 가출했고, 그때부터 숨통이 트였는데, 엄마랑 둘이서 집에서 지내는 것도 엄청 고통스러웠다고. 어머니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골프를 끝내고 매일 와인을 드셨는데 어느 날은 기분이 좋은 정도이지만 자주 취하셨고. 남편 없이 아들 셋을 키워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냐면서 너희들은 본인한테 잘해야 한다는 하소연을 계속 들어내야 했었다고 했다.
남편이 불쌍했다. 많이. 이상한 행동들이 설명이 되는 느낌이 들면서 내가 사랑을 온전히 주면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때 남편은 집안에서 천덕꾸러기 같은 느낌이었다. 무슨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았고 무시받는 게 기본에 깔려 있었다고 해야 한다. 내가 바꿔주고 싶었다.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랑을 많이 주면 얼마나 좋아지는지.
무슨 일이 있을 때 남편을 질타하는 아주버님과 어머니에게 살짝 어렸을 때 너무 많이 맞아서 그런 거 아닐까요 변명 아닌 변명도 해주고 그때는 형이 동생을 때릴 수도 있지 하시는 아주버님과 나는 전혀 몰랐다고 몰라서 어쩔 수 없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어머니에게 내가 옆에 든든히 옆에 있어 보겠노라고 했다.
그리고 긴 생각과 대화 끝에 같이 일하던 언니는 나를 응원하겠노라고 하고 모든 걸 다 놓고 투자했던 돈의 반을 가지고 떠났다. 시작했던 유아교육 코스도 끝내지 않고 갔다. 둘이 하던 일을 혼자 하려니까 너무 힘들었는데 그 당시에 나는 내가 얼떨결에 벌려놓은 일이라도 내가 책임져야겠다는 생각에 그냥 했다. 사실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학교 다니랴 숙제하랴 장사하랴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이동 거리도 무리였고 하루도 쉬는 날이 없는 스케줄이 좀 버거워져 가고 있었다. 너무 멀었던 우리 집은 다른 사람에게 싼 가격에 하숙을 주고 아라저리 생각과 고민을 하고 판단한 끝에 학교나 쇼핑센터가 가까웠던 시내 중심지에 있던 어머니 집에 들어가서 살기로 했다. 골드코스트에 진짜 멋진 바닷가 앞에 있던 아파트였다.
남편도 아주버님과 청소일을 열심히 하고 나의 쇼핑센터 일에 픽업이나 물건들을 배달해 주고 그냥 열심히 삶을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였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다가 보면 길이 보이겠다고 생각했다. 매일매일 일만 하고 숙제하고 쓰러져서 잠만 자는 스케줄이라 어머님과 그리 크게 부딪힐 일이 없어서 다행이었는데 일주일에 2~3번씩 취하시는 어머니가 너무 힘이 들었다. 늦게까지 시달리다 겨우 자면 나는 못 일어나겠는데 어머니는 하루도 안 빠지고 새벽부터 일어나셔서 준비하시고 골프를 가셨다. 체력도 대단하시고 건강도 대단하시다고 느꼈다.
그래. 그래도 장사가 잘됐다. 힘이 들지만 장사가 잘됐다. 조금만 더 하면 학교 코스도 끝나고 이제 좀 괜찮아질 거다.라는 생각만 하며 매일매일을 버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