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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뚝 하나

by 파란


여지껏 우리 집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불상사는 하나같이 가족들이 먼저 사고를 쳐서 일어났다.


나는 열아홉도 아니고 19살도 아니고 고3이다. 명료함이란 지독히 또렷해서 나머지를 전부 잊게 만든다. 나에게는 고3이라는 명료한 역할이 있기에 충실히 살아가는 편이다. 내게 고3이란 역할이 있다면 고등학교는 고등학교의 역할이 있다. 시험마다 수준별로 반을 나누든, 상위 20명 뽑아서 지원하든, 하위권에게 도서관 자습을 불허하든 내 알 바 아니지 않은가. 그들은 그들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고 나의 역할에 도움이 되니. 어떤 몰상식한 애들은 나를 욕하기도 한다. 오직 성적에 포함되는 활동만 열심히 한다고 말이다. 아니다. 그런 게 아니야. 선택과 집중이라는 훌륭한 단어가 있다. 나에게 우선순위는 당연히 나지. 내가 나의 재수를 논하는 뒷얘기가 도는 걸 알고도 관망하는 이유는 하나다. 근본적으로 밑에 있는 것들에게 머리 숙여봤자 그들의 머리는 내 발아래 있으니까. 그러니 인내라는 비위 정도는 맞춰줘도 된다.


간혹 비위도 아까운 자들이 있다. 가족. 나는 도통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자식에겐 효라 이름 붙이는 의무가 있다. 그렇담 부모는? 일단 안방의 여왕이나 소파 돼지의 의무는 아닐 테다. 여왕님께서는 소름 끼치게 통제를 사랑하신다. 내 핸드폰에 몰래 감시 앱을 깔았다거나 30분 단위로 작성하는 플래너를 매일 검사한다든지. 한 번은 반 애들 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내가 성적으로 비웃었던 몇몇에게 나와 놀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돼지는 가축답게 침묵을 지킨다. 뭐 눈을 뜬 모습을 본 적이 있어야지. 아침 6시에 집을 나설 때도, 밤 10시에 돌아올 때도 소파에 붙어있다. 이러다 소파 가죽이 살가죽과 이어지겠다. 요즘에는 그나마 변명거리가 되어주던 일마저 정년퇴직해서 사라졌다. 매일같이 유튜버와 화면 사이에 두고 킬킬거린다. 렉카 유튜버와 극우 유튜버는 가십에 달려드는 모기에 불과하다. 피만 쪽쪽 빨다 배 채우면 내 소중했던 양식이 말라리아에 걸리든 말든 미련 없이 떠나는 족속. 기왕이면 일본뇌염까지 선물하는 족속. 뭐가 그리 즐거운지 돼지는 모기가 자신도 빨아먹는 줄 꿈에도 모르고 앵앵 소리에 맞춰 손가락으로 춤을 춘다.


형제자매는 우애라는 의무가 있다. 나는 우애를 위해 친히 집을 나가주신 왕자님과 나를 벌레 보듯 하는 창녀와 피를 나눈 게 부끄럽다. 여왕님의 관심을 독차지하며 날 스트레스 측정용 펀치 기계로 이용한 왕자님. 그대가 이 집안을 즈려밟고 나가주신 덕에 그대 칼에 찔리던 악당에게 평화가 찾아왔답니다. 여왕님을 배신한 그대도 나처럼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는 결말 따위 사치인 악당이 되어버렸지만요. 창녀를 위해 해줄 말은 딱히. 차라리 성매매가 합법이 되어서 내 핏줄에게 빨간 줄만 안 그어지길 바랄 뿐이다.


한때는 밖에서 내 편을 찾았던 것도 같다. 내 말을 들어주던 친구들이 그 말을 내팽개치기 전까지. 나의 가정은 평범한 편인 줄 알았는데 남들은 한 가족당 하나만 있을 문제를 종류별로 가진 게 화근이었다. 뿌리는 무럭무럭 자라서 친구들은 나라는 가지를 쳐냈다. 혼자 다니는 건 오히려 공부에 집중하기 쉬웠으나 같이 다닐 친구 하나 없는 나를 책망하는 듯한 시선은 견디기 힘들었다. 나를 위한 쥐구멍은 어디에도 없으니. 시기 질투에 가득 찬 쥐새끼들은 나부터 사양이다.


창밖으로 앵두나무가 보인다. 봄에서 겨울, 앵두꽃에서 눈꽃 사이, 이 아름다운 새빨간 열매를 서 말, 아니지 다섯 말쯤을 그 작은 키에 다닥다닥 매달고 서 있었을 앵두나무의 고달픈 시기를 생각한다. 나는 부러움을 주체 못 하고 있다. 나도 책 다섯 권 대신 앵두 다섯 말이고 사계절을 책상에 앉는 대신 저 밖에 서 있고 싶다.


여느 때처럼 가족은 사고를 친다. 오늘은 오랜만에 소박한 하루여서 머릿속에 추한 생각이 불쑥 고개 들지 않던데.

“너희 외할머니 사고당하셨단다. 중상이라 아직 못 깨어나셨대.”

죽기 직전은 아니라 전화했을 거라는 생각이 불쑥 고개를 든다. 돼지의 목소리에서 떨림이 느껴진다.

“엄마는 알아?”

“아니. 병원에서 너희 엄마한테 먼저 전화했는데 안 받았대. 너 집 가서 엄마 만나면 소식 전해라.”

이제 내 뇌는 이 사실을 어떻게 한낱 소식처럼 전할지로 가득 찬다.


나는 고스란히 서 있다. 어떻게 말해도 울고불고 난리이겠지. 소중한 나의 시간을 허비해 가며 한참 동안 서성인다. 시험 기간이다. 낭비한 몇 분이 아까워. 한 걸음, 한 걸음. 재난으로 걸어가고 있다. 나는 여왕님을 마주하고 냅다 웃는다. 생전 처음인 양 이상한 웃음은 광대의 부들거림에서 정점을 찍는다.

“내가 너무 늦었나. 그게 웬 눈인지, 버스가 끊겨서 혼났어. 같은 학원 애한테 사정사정해서 그 집 자가용을 얻어 타고 오는 길이야. 시간 단축 제대로 했는데도 이제야 도착이네. 정말 지독한 눈이었어.”

나는 여왕님 어깨너머로 눈과는 무관한 바닥과 천장의 무늬를 바라보며 말한다. 빨리 말하자. 당장.

“엄마, 놀라지 마세요.”

최선의 포문이다. 열자마자 대포가 쏟아질.

“외할머니가 다치셨대, 엄마. 중상인가 봐. 아빠는 갑자기 술자리가 웬 말이야. 언니야 당연히 연락 안 받고.”

여왕님은 울먹이며 새빨간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다.

거 봐. 여왕님 쇼크 받으셨네. 그렇게 한꺼번에 말하지 말걸. 대안이 있긴 한가. 아무 때 알려도 알려야 할 건데. 그래그래, 자식이 나쁜 일 당한 걸 부모에게 속이는 건 봤어도 부모한테 일 생긴 거 자식한테 숨기는 건 못 봤다.

와중에 내 어깨 위 악마들은 작은 말다툼을 한다. 여왕님은 그새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나는 어쩌란 거지. 나는 내 방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못다 한 숙제를 떠올린다.


다음 날 여왕님의 닦달에 학원을 빼고 병문안에 간다. 할머니는 축 늘어진 청경채 같다. 늙어 물기 다 빠진 그런 녹빛의 식물. 여왕님과 가축은 말하느라 바빠서 할머니가 눈을 떴는지도 모르고 있다. 백지장 같은 모습과는 딴판으로 또렷하고 생기 있는 눈이다.

“수의는 장만해야 하나?”

“아니, 뭐 그런 끔찍한 걸 미리 장만을 해?”

여왕님은 끔찍하다는 눈동자로 되묻는다.

“어휴, 묘지는?”

“묘지? 그런 것도 미리 장만하라고?”

“집안에서 살림만 하더니 할 줄 아는 게 뭐야, 대체. 아버지 장례 때 멀뚱멀뚱 서 있더니 이럴 줄 알았다. 이런 순 엉터리니…….”

“고향 근처에 묻어드리면 되지 않겠어?”

“당신 알아서 해라. 네 어머니니까.”

돼지는 체념한다.

“에미야, 나 좀 보자.”

할머니가 정정한 목소리로 끼어든다.

“왜요?”

여왕님은 방금의 논쟁으로 기분이 상했는지 무뚝뚝하게 답한다.

“나 죽으면 묘지 쓰지 말아.”

할머니의 목소리는 평상시처럼 잔잔하고 만만치 않다.

“유언 삼아 말하는 거야, 뒀다 꼭 어김없이 해라. 나 죽거든 내가 느이 할머니가 바라던 대로 해라. 누가 뭐라든 상관하지 마라. 부탁이다.”

“할머니가 바라던 대로요?”

“꼭 그대로, 그걸 설마 잊고 있진 않겠지?”

“묻어드린 걸로 기억하는데…. 아닌가요? 언제 적 일인데 기억해요.”

“어머니는 강에 뿌려지시길 바라셨어. 부탁한다. 나는 그렇게 마무리하고 싶다”

할머니는 글자마다 힘을 짜내여 말을 잇는다.


집에 돌아와 가족들은 할머니의 유사 유언에 대한 의견을 꺼내기 시작한다.

“엄마, 뼈를 막 뿌리는 건 너무 민폐야.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요즘 누가 강에다 뿌려?”

창녀는 속사포로 쏘아댄다.

”납골당보다 비용은 아끼겠네. 그건 찬성이야. 매년 찾아가는 게 일이겠지만. “

“매년 강까지 어떻게 가. 이런 말은 죄송하지만 시간 낭비야. 좋은 마음으로 자주 찾아가는 게 낫지 않겠어? “

나는 돼지의 말에 반박한다. 최대한 솔직하게. 이런 사항은 위선 떨 바에 위악이라도 떨어야 내 시간을 아낀다.

“아들은 연락돼? 아무리 그래도 상의는 해야지.”

여왕님은 왕자님을 애타게 부른다.

“메일을 읽었는데 연락이 안 돼. 포기해. 이 자식은 자식 취급하지도 마.”

돼지는 단호히 말을 자른다.

“어머니 바람이니까 들어드려야 해. 우리 엄마 마지막은 내가 결정해. 다들 그런 줄 알아.”

여왕님은 탕탕탕 망치로 논쟁의 끝맺음을 선언한다. 말뚝을 박아버린 결정에 우리는 반기를 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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