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국제고에서는 2박 3일의 신입생 적응 기간과 2주 조금 안 되는 영어캠프가 존재한다. 나는 오직 두 밤만을 위해 잔뜩 쟁여둔 캐리어에 설레는 마음을 쑤셔 넣고 국제고로 출발했다.
정신없는 날들이었다. 툭하면 시청각실에서 안전 교육을 하고, 툭 안 해도 교칙 안내를 듣고… 새로운 환경이라 긴장 잔뜩이었다. 몇 시간은 말이다. 열심히 듣고 있다는 뜻의 끄덕임이 졸고 있다는 뜻의 끄덕임이 되기까지 순식간이었다. 그래도 곧 졸업인 선배들의 공부 방법 소개는 단 한 번도 졸지 않고 끝까지 들었다. 무려 서울대학교를 합격한 선배의 공부법은 매우 이상적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선배의 공부법은 단순하고 당연했으나 공부량이 어마어마했다. 실은 세상만사 다 그렇다. 규칙적으로 수학 문제를 풀고, 영어 단어를 외우고, 선생님이 강조한 부분을 암기하면 높은 점수를 받는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술과 담배를 멀리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고, 주변인에게 친절한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행동하는 사람은 드물다. 드문 성공은 흔한 논리에서 시작한다.
한참 후 교실에 도착하니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한 면을 빼곡하게 채운 선배들의 글씨였다. 읽다가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첫 룸메였던 후지산(별명)이 칠판을 배경으로 열심히도 사진을 찍어주었다. 후지산은 이틀의 밤을 책임져준 고마운 친구였다. 밤마다 어쩜 국제고는 죄다 똑똑한 아이들로 채워놓았을까, 내 입 속의 영어는 50년쯤 후에 나올 생각일까, 원어민 선생님은 분명 한국어를 알아들으시는 게 분명하다 등등 별의별 불평불만을 다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사실 생판 모르는 남과 좁아터진 방에서 단 둘이 지내야 했던 2박 3일이 불편하기도 했다. 방이 가뜩이나 좁는데 침대, 옷장, 책상, 선반이 두 개씩 자리 잡고 있었다. 화장실 소리는 침대에 누워있어도 잘 들려서 초반에는 학교 화장실을 갈 때까지 참았다. 쉬다 보면 느껴지는 어색한 정적도 문제였다. 뭔가를 계속 말해야 할 것 같은데 모양만 멀쩡한 입은 금방 소재를 고갈해 버렸다. 여러 룸메를 만나야 하는 3년에 한숨만 나왔다.
첫인상의 낯들이 모이는 곳은 으레 탐색전이 있기 마련이다. 특히나 학교는 홀로 살아남기의 난이도가 굉장하므로 밥 먹을 친구 정도는 찾아야 했다. 나는 늘 이 과정을 가위로 잘라버리고 싶었다. 괜히 눈치 보게 되는 오묘한 분위기가 피곤했다.
“저랑 평생 친구하실 적당히 웃기고, 적당히 착하고, 적당히 활발한데 적당히 노는 사람 손 들어주세요.”라고 말해도 웬 미친놈으로 찍힐 일이 없으면 얼마나 편할는지.
영어캠프는 단어 시험, 수업, 클럽 활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미래의 국제고생, 부디 영어캠프에 스트레스받지 마시길. 수업은 원어민 선생님들이 차례로 들어오셔서 경제, 문학, 영화처럼 다양한 분야를 아주 기초적으로 설명해 주신다. 개념 대신 활동 위주였다. 영어로 시를 써보는 활동은 그나마 흥미로웠다. 책상이 교탁을 향했던 중학교와 달리 마주 보고 앉아 쉴 새 없이 떠드는 조별 활동의 연속이었다.
클럽은 의사 결정의 전통 방식, 가위바위보로 정했다. 스포츠 클럽이 탐나기는 했다. 그러나 무슨 바람이 불어서 한겨울 날씨에 농구하다가 오른손 중지에 금이 간 모양새로 스포츠 클럽을 신청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이름부터 friendly 어쩌고 클럽에 냉큼 들어갔다. 친구 사귀기 덜 귀찮을 듯하여. 고릿적 액체괴물 만들기, 유행하는 릴스 찍기, 동그랗게 서서 게임하기와 같이 공부를 고이 접어 버린 활동을 했다. 이상한 영어를 써도 어차피 난리법석이라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부담은 덜 했다.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나는 드문 사람인 줄 알았건만, 흔해 빠진 사람이었다. 국제고에서는 드문 흔한 사람이었다. 성적에 있어서는 열 손가락 안에 꼽힌 내가 그 열 손가락으로 우물을 기어 올라오니 거대한 벽이 보였다. 서울 끝자락과 비교 불가의 교육을 받고 자란 아이들 투성이었다. 내가 우물 속에서 개구리들과 치고받고 싸우는 시간을 저들은 어떻게 썼던 것일까. 시간의 가치는 하늘과 땅 차이였음에 확신한다.
‘내가 하려던 말은 그게 아니야. 한국어로 하면 정말로, 정말로 잘할 자신 있다고.‘
영어로 말할수록 영어로 말을 꺼내기 무서워진 이유는 칭찬만 받던 특별한 중학생이 초라한 일반 학생 1이 되어가는 불안에 있었다. 유창한 발음을 뽐내는 아이들 사이에서 하찮은 발음 뱉어내기 민망했다. 나도 멋있는 그들 가운데 하나이고파 틈새를 비집으려 안간힘을 쓰는 우스운 꼴이었다. 높은 벽은 자기도 모르게 어두컴컴한 그림자를 만들기 마련이다. 나는 벽을 오르던지, 다시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방법뿐이었다. 그늘의 시원한 바람을 즐기다 벽의 끝을 찾아 나의 길을 걸어가는 방법은 까맣게 잊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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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6시에 일어나 영어 단어를 외우며 20분 동안 지하철을 타고, 5분 허둥지둥 걷고, 5분 덜컹거려서 잘못하면 토 나올 마을버스 타고, 10분 언덕길을 등반하고, 단어 시험, 수업, 클럽, 끝나면 바로 수학 학원으로, 집에 오면 컴컴한 저녁, 숙제, 씻자마자 기절. 하필이면 부모님과 사이도 최악이라 차로 20분 걸리는 통학을 부탁하지도 못했다. 악재는 연달아 일어난다고 들 한다. 큰 악재 하나를 애써 버티고 있는 중에는 작은 돌멩이가 사무치게 밉기에 평소라면 가볍게 쳐낼 일을 견디지 못한다.
샤워하면서 오래 울었다. 당시에는 내가 왜 우는지조차 무감했다. 아마 한없이 큰 나라는 사람이 한없이 작은 사람이었다는 현실을 체감하는 성장통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