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착각이 자유라면 자유를 누리리라.
이른 봄 햇살이 반가워서 뽀득여사는 아직은 쌀쌀한 공기지만 잠시 가게 문을 열어두기로 했다. 아가는 공기가 찬 지 몸을 ‘부르르’ 한번 떨더니 모포 속으로 엉덩이를 쏙 넣고는 엎드렸다.
“뽀득 사장님, 안 추워요? 문을 활짝 열고 계시네. 청소 중이신감?”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들르는 불독할매 행차였다. 오늘 불독할매는 생전 입지 않던 꽃분홍색 원피스를 차려입고 있었다. 하기는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요즘 불독할매의 외모는 리즈 갱신에 갱신을 거듭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머, 맹사장님은 벌써 봄이시네요. 큰 봄꽃이 걸어 들어오는 줄 알았는걸요. 잘 어울리시네요.”
‘아구구, 저런 말주변을 배워야 되는데. 책을 많이 읽었을 거야.’
불독할매는 옷이랑 화장은 까짓 거 돈 주고 사면 되는데 뽀득여사의 저런 우아한 말솜씨와 말투는 당장에라도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데 일단 한 점 지고 들어가는 거다 싶어서 살짝 기운이 빠졌다.
“아차차, 내 정신 보라니까. 이거 우리 아들 녀석이 과수원서 올려 보낸 토마토인데, 설탕 팍팍 뿌려서 가져왔슈, 혼자 먹으려니 심심해서 뽀득 사장님 생각나서 같이 먹어볼까 하고 들고 왔는데 봄꽃 얘기에 홀딱 정신 빠져서 잊어버릴 뻔했네.”
“설탕 뿌린 토마토 맛있겠네요. 예전에 그렇게 많이 먹었었는데. 추억의 맛이네요. 홍차 따뜻하게 우려드릴 테니 같이 드세요. 앉으세요.”
불독할매의 작전은 술술 진행 중 인 듯하다. 일단 뽀득여사와 친해지기 작전은 ‘늘 친절하고 우아한 뽀득여사’ 이기에 문제없을 것 같은 확신이 들면서, 불독할매는 기분이 좋아 자신도 모르게 ‘흥얼흥얼’ 트로트 가락을 흥얼거렸다.
바로 그때. 불독할매는 흥얼거리던 노랫가락을 뚝 멈추고는 순간 얼음이 된 듯 열린 가게 문을 바라보았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햇살을 등지고 우리의 은발 왕자님이 ‘두둥’ 등장한 것이다.
불독할매는 입안에 홍차를 ‘꿀꺽’ 삼켰는데 그 소리가 천둥처럼 들리는 듯했다. 오매불망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리고 그야말로 호시탐탐 노리던 기회가 아니던가! 불독할매는 ‘어쩐지 딱 지금 내려와 보고 싶더라니.’라고 속으로 외치며 정신을 차리고 짐짓 태연한 척하느라 다시금 홍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탁자 위의 티슈로 입가를 꾹꾹 찍어냈다.
만인의 연인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두 여인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은발의 신사는 오늘도 과하지 않지만 멋스러운 옷매무새와 젠틀한 미소를 장착하고는 듣기에도 딱 좋은 목소리로 “좋은 아침입니다. 아니 벌써 점심때가 다 되었지만요.”라고 말하며 가게를 들어왔다.
“베이커리 좀 가져왔어요. 딱 출출할 때이실 것 같아서요.”
재우님은 뽀득여사에게 베이커리 봉지를 건네면서 약간 겸연쩍은 듯이 초록 소파에 앉아있는 불독할매를 쳐다보았다.
“손님이 계시네요. 그럼 저는 나중에 다시…”
“아니에요. 재우님. 초면도 아니신데 함께 자리하세요. 지난번에는 고구마 티타임. 오늘은 베이커리 토마토 티타임이네요.”
뽀득여사는 두 사람에게 번갈아 가며 미소를 보내며 재우님에게 자리를 권했다. 재우님은 “그럼 실례하겠습니다.”라고 젠틀한 멘트와 함께 합석을 하였다.
불독할매는 뭐라 대꾸를 해야 할지 몰라하며 약간 쑥스러운 듯이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를 하고는 또 홍차를 꿀꺽 목에 넘겼다. 홍차 잔 덕분에 ‘배실 배실’ 나오는 웃음을 어느 정도는 가릴 수 있었다.
“오늘 음악 선곡이 딱 좋습니다. 하하하.”
콰지모도의 ‘춤을 춰요 에스메날다’의 묵직한 노래가 끝나고 에스메날다의 감미로운 ‘보헤미안’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재우님은 의미 있게 뽀득여사를 바라보며 씽긋 웃어 보였다. 뽀득여사도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불독할매도 애매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뭐여. 이 음악이 뭔지 알아야 대꾸를 하지. 오메, 장단 맞추기 어렵네. 어려워.’
불독할매는 아직도 따끈따끈 한 페스츄리를 하나 집어서 한입 베어 물고를 오물오물 씹었다.
“아이고, 이 빵 맛나네요. 이렇게 맛있는 빵을 어디에서 사 오셨을까나.”
불독할매는 진심으로 빵이 맛나서 재우님에게 스스럼없이 물었다.
“이 빵은 홈베이킹입니다.”
“홈베이킹이라는 빵집이 우리 동네에 있었던가요?”
하하하. 재우와 뽀득여사는 악의 없이 진심으로 유쾌하게 웃었다. 불독할매도 이 웃음 포인트가 뭔지 영문은 잘 모르지만 덩달아 유쾌하게 웃었다. 아무튼 베이커리 토마토 티타임은 그렇게 유쾌하게 마무리되었다.
불독할매는 홈베이킹이 빵집이름이 아니라 멋진 재우왕자님이 손수 빚어낸 빵이라는 금쪽같은 사실만이 아니라 재우님이 어느 단지에 사는지, 호주 ‘멜건’ 아니, ‘멜버논’ 아니, ‘멜버른’에서 영구 귀국했다는 거(이 단어를 어떻게 기억했는지 불독할매 스스로도 신통방통할 따름), 요즘 글도 쓰고 빵도 굽고 사진도 찍으며 지낸다는 것, 더 나아가 최근 꽤 자주 뽀득여사네에 들른다는 것 등등. 꽤 솔솔 찮은 정보를 알아낸 것이다. 또 그만큼 이런저런 이야기도 함께 나누었고 말이다.
불독할매는 오늘 ‘완전 계 탄 날’ 기분이었다. 불독할매는 ‘가만히 가만히 오세요. 이리저리로 음! 음!’의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며 두툼한 허리를 살랑살랑 흔들어 가며 3층 계단을 올라갔다.
한켠 으로는 뭐랄까, 눈치 백 단의 불독할매의 눈에 딱 들어오는 두 사람의 묘한 기류에 ‘생각보다 진전이 많이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조바심이 동시에 올라왔다. 또 한켠에서는 재우님이 ‘빵 하나 더 드세요’라고 불독할매에게 빵을 권하기도 하고 불독할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 내어 웃어주기도 했던 것들을 떠올리며 ‘아직은 충분히 승산이 있어. 암만!’을 외치며 기운이 불끈불끈 솟는 것이었다.
불독할매는 몇 달 전에 뽀득가게에서 샀던 거울 앞에 서 보았다. 불그레한 볼 때문인지 꽃무늬 원피스 때문인지는 몰라도 불독할매의 눈에 오늘따라 꽤 젊어 보이는 데다가 꽤 어여뻐 보이기까지 한 자신의 모습에 한참을 그렇게 거울 앞에 서 있었다.
"내가 이렇게 괜찮았나? 뭐여 기죽을 거 하나 없네. 뽀득여사보다 못할게 뭐냐 말이여! 키도 더 크고 요것도 뽀득사장이랑 비할 바 가 아니지. 암만!"
불독할매는 두툼한 두 손으로 가슴을 옴팡지게 쥐고는 좌우로 흔들어보았다.
불독할매는 자신감이 급상승하면서 이제 본격적으로 박차를 가해 볼 때가 되었음을 선전포고라도 하듯이 갑자기 ‘뿌-웅!’ 우렁차고도 긴 뱃고동 소리 같은 방귀를 시원하게 뀌어버리는 것이다. 사실 체질에도 맞지 않은 점잔을 빼며 홈베이킹(이 단어도 멜버른만큼이나 외우는데 공을 들였음) 빵에 설탕절임 토마토에 홍차까지, 사실 평소 식단과는 사뭇 다른 터에 참고 참았던 가스가 기분 좋게 축포 터지듯 터진 것이다. 덤으로 몇 초 후 ‘끄-윽’ 위에서도 축포가 발사되었다.
바로 같은 그 시간.
「지영님, 사실 아까 가게에 들렀을 때 여쭤 보려
했었는데 혹시 시간 되시면 쉬시는 날
나무들 격려해 주러 가실래요?」
「재우님, 오늘도 빵 너무 맛있었어요.
혹시 오늘 다과 자리 불편하셨던 것은 아니시지요^^
그런데 나무들 격려요??」
「하하하. 네 나무들 격려요.
새 순 내보내느라 애쓰는 초봄 나무들 격려요.
등산도 좋고요.
아니면 가볍게 호수공원 산책도 좋고요.」
「아하, 멋진 표현이시네요. 네 좋지요.
기특한 나무들 격려 해 주러 가요.」
뽀득여사는 초록 소파에 앉아서 재우님과 그렇게 메시지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가운데 어느덧 골목 안에는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뽀득여사는 귀여운 아가가 벌써 몇 차례나 꼬리를 살랑 거리며 애교를 부리며 소파 밑을 왔다 갔다 하는 것도 모른 채 핸드폰 화면을 보며 소녀처럼 키득키득 웃고 있는 것이다. 뽀득여사의 눈가의 잔주름이 아코디언처럼 좁혀졌다 넓혀졌다 반복하였다.
온 사방의 나무들은 밤 낮 없이 새순을 내어 내느라 애를 쓰고 있고, 우리 은발의 신사 숙녀는 또 다른 새순들을 내어 내느라 설레는 초봄의 밤이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