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밤 가을비가 상당히 내렸다. 일기예보가 기분 좋게 빗나갔다. 오늘도 가을비 계속 온다 했는데 아침에 눈뜨자마자 창밖을 보니 비가 그쳤다. 오늘 예보는 빗나가니 좋았다. 역시 정확한 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비가 와도 우산 쓰고 올라갈 참이었다. 그런데 양손도 가볍게 오를 수 있게 되어 마음도 손도 발걸음도 가볍게 화담숲을 오를 수 있었다.
수년 전, 따스한 봄날의 화담숲은 꽃동산이었다. 정갈하게 손질이 되어 있지만 자연 그대로의 정취를 보여주고자 애쓴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봄날의 화담숲은 싱그럽고 맑은 새 잎사귀들과 다채로운 꽃들 그리고 이 꽃 저 꽃으로 나들이 다니느라 혼이 빠진 듯 나풀거리는 노랑, 하양, 점박이 나비들과 엉덩이 통통한 꿀벌, 호박벌들로 동화나라 같은 정취에 빠졌던 기억이 있다.
너무 좋으니, 계절마다 해마다 틈나면 오자며 콧노래 흥얼거리며 내려왔던 화담숲.
자주 보자, 또 만나자 손가락 걸고 약속해도 우리 사는 삶이 뭐가 바쁜지 좋은 사람과의 만남약속도 빈소리가 되어버리 듯, 마음과 다르게 화담숲과의 약속은 몇 해동안 지키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갔다.
그리고 다시 좋은 계절이 왔다. 가을의 화담숲도 너무 좋을 테지.
가을은 우리 동네 골목 나뭇잎도, 출근길 도로변 가로수들마저도 이미 작품이다. 우리 집 작은 앞마당의 연노랑 소국과 공작단풍나무도 소박하지만 가을정취의 한몫을 해내고 있었다. 하물며 소소한 도심의 나무들도 그러한데, 화담숲은 이미 가을축제가 한창이리라. 몇 주 전부터 기대하고 기다렸던 날이 오늘이었다.
모노레일을 타고 화담숲의 어느 지점까지는 오를 수 있었지만, 우리 가족은 처음부터 걸어 올라가자고 합의했다. 작은 나무, 이끼 오른 돌무더기 까지도 이쁜데 그냥 지나쳐 올라가기 아까웠다. 어제 밤새 내린 비를 듬뿍 머금은 화담숲은 모든 생명들이 촉촉한 생명의 숨을 내뿜고 있었다. 화담숲은 가을축제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저마다 채색을 막 바꾸기 시작해서 아직은 여름잎의 싱그러움과 가을의 농익음이 섞여 있었다. 몇 년 전에 비해 화담숲이 더욱 유명세를 탔는지 아침부터 화담숲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서두르십니까? 천천히 산책하며 올라가세요.
역시 화담숲은 가을도 너무 좋았다. 깊게 숨을 들이쉬자 깨끗하고 맑은 공기가 폐 깊숙이 스며든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모든 나무들과 꽃들은 생명의 충만함을 노래하는 듯했다. 산책로를 따라 사람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오른다. 아직은 붉은 단풍과 초록빛이 절묘하게 섞인 화담숲은 꽃과 잎사귀를 풍성히 모아 놓은 큰 꽃다발 같았다. 이렇게 좋은 경관 속에서도 느긋함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나는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다. 화담숲은 산책로를 따라 전체 숲을 쭉 둘러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우리보다 발걸음이 더딘 앞사람들 몇 팀을 지나쳐 올라갈 즈음, 나무들 사이에 있는 푯말이 나를 ‘뜨끔’하게 만들었다.
‘왜 그렇게 서두르십니까? 경치구경 하시면서 천천히 산책하세요!’
나를 위해 준비된 푯말 같았다. 앞사람들을 지나쳐 올라갈 이유도 없었고 시간의 촉박함도 없는 상황에서도 나는 무엇을 위해 서두르려 했을까? 발걸음의 속도를 늦추었다. 어깨를 펴고 큰 숨으로 피톤치드 가득한 공기를 들이마신다. 천천히, 여유 있게 이 아름다운 자연 속에 충분히 멈추어본다. 나무기둥에 손을 얹어보니, 쿵쿵 나무의 심장소리가 느껴지는 듯하다.
천천히 걷다가 멈추었다가 하니, 이제는 큰 나무틈의 숨은 이끼도 보이고 막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나뭇잎에 매달린 이슬방울도 보인다.
충분히, 천천히, 여유롭게! 화담숲에서의 산책은 바로 이렇게 하는 것!
산길에 놓인 돌계단과 어우러진 나무들이 운치 있다. 하얀 곧은 기둥의 자작나무 숲은 신비스럽다. 큼지막한 돌틈사이의 우거진 키 작은 나무들의 어우러짐이 정겹다. 푸른 소나무의 기품 있는 당당함이 격조 있다. 이끼 덮인 땅 위의 붉고 여린 잎사귀의 무리가 탐스럽다.
돌계단을 천천히 오르고, 자작나무 숲의 신비한 기운에 한참을 멈추어 보고, 돌틈사이 키 작은 나무들과 어깨를 나란히 마주해 보고, 기품 있는 소나무의 기백에 함께 웅대 해지고, 이끼 덮인 푹신한 땅을 지그시 밟아보며……. 나는 화담숲에 온전히 들어가 있었다.
돌계단을 오르니 물고기가 날고, 자작나무 숲 사이로 어치가 숨바꼭질을 한다
숲 돌계단을 오르는데 물고기가 지느러미를 우아하게 펄럭이며 날아간다.
자작나무 하얀 기둥 사이사이 보일 듯 말 듯 어치들이 숨바꼭질한다.
키 작은 나무 틈에서도, 기백 있는 소나무 기둥사이에서도, 이끼 더미 안에서도
나는 보았다. 천천히, 여유 부리며 날아다니는 크고 작은 물고기들을.
나는 어디에 와 있는 것인가?
나는 누구이고 여긴 어디인가?
너무도 아름다운 숲의 정령에게 혼을 빼앗겼나?
몽환의 숲에서 길을 잃은 걸까?
아니면, 나는 너무 아름다운 꿈속을 헤매고 있는 것인가?
오늘의 화담숲은 지난밤의 가을비 때문인지 매우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아마, 아침에 채 걷치지 않은 운무에 싸여 있었기 때문인지도….
P.S. 문학적 상상력에 뒷일을 맡기고 이 사실을 밝히지 않을까 하다가 혹여라도 ‘이게 뭐지?’ 궁금함에 힘들어하실 독자를 위하여 밝힙니다. 화담숲 안에 화담숲의 모습을 그대로 축소하여 어항을 꾸미고 그 안에 물고기들이 노니는 작품을 전시한 전시관이 있었습니다. 그 전시관의 작품들을 보고 있노라니 더욱 꿈결 속에 있는 듯, 저 어항 속에 내가 들어간 듯 하였습니다. 문학적 상상력의 물구나무 정도로 봐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