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에서 큰길 하나를 건너면 학원가이다. 고즈넉한 주택가인 우리 집 주변과 다르게 학원가는 늘 생동감이 넘쳐난다. 물론 아이들은 '공부'라는 짐을 머리와 어깨에 짊어지고 오고 갈 테지만, 뽀송뽀송 아이들이 삼삼오오, 때로는 우르르 몰려다니는 학원가에는 언제나 움트는 생명의 에너지가 있다.
비속어와 욕설을 간투사로 넣어가며 꽥꽥 소리 지르며 떠드는 아이들 소리에 깜짝 놀라기도 하고, 목소리에 ‘끼룩 끼룩’ 변성기 꺾임이 절묘하게 들어간 아직은 동그란 어깨의 중학생들을 보면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찬 바람 부는데 똥꼬치마 교복을 입고 움츠리고 종종 다니는 여학생들 보면 감기라도 걸리면 어쩔까 걱정스럽기도 하고… 아무튼 학원가에는 늘 아이들의 숨결이 있어서 좋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학원가에는 학원 외에도 각종 편의시설(음식점, 카페, 문구점, 은행, 대형편의점, 병원, 다이소, 올리브영 등등)이 모여 있다. 그래서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 동네 옆 학원가를 좋아한다.
그날도 학원가를 지나가는데 우연히 발견한 그것!
오민석.
참 또박또박도 새겨놓았다. 보도블록 옆의 부분적으로 보수해 놓은 시멘트바닥 위에 떡하니 새겨져 있다.
그 이름도 분명하게! 오민석!
오민석이 쓴 건가? 아니면 오민석의 친구가 쓴 건가?
그냥 지나쳐 몇 걸음 걷다가 문득 드는 생각.
오민석이 쓴 건가? 아니면 친구가 쓴 건가?
친구가 썼다면,
오민석이랑 친한 친구가 쓴 건가? 오민석을 싫어하는 친구가 쓴 건가?
웃음이 쿡쿡 나오면서도 그 진실이 궁금해졌다.
가족들의 저녁 식사시간. 갑자기 ‘오민석’이 생각나서 상황을 설명했다.
딸은 오민석이 썼을 거 같다고 했고, 남편은 오민석의 친구가 썼을 거라고 매우 자신 있게 말했다. 남편이 너무 자신감 넘치게 말해서 나는 그 이유를 물었다. 마침 남편은 요즘에 형사, 경찰 드라마를 섭렵해서인지 나름 분석적으로 말했다.
“오민석이 썼다면 자기 이름을 그렇게 대놓고 크게 쓰지는 않았을 거야. 그리고 중학생의 짓이지. 고등학생만 되어도 그런 장난 안 할 것 같고!”
듣고 보니 일리가 있다.
“그럼 오민석이랑 친한 친구일까? 안 친한 친구일까?”
“그건 모르겠고!”
역시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고, 남편의 성향대로 솔직한 답변이다.
아무튼 우리 가족은 알지도 못하는 오민석에 대해 재미있게 입담을 오갔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왠지 이름도 입에 착착 붙는다. 오민석!
성선설 또는 성악설, 아니면?
새하얀 도화지, 새로 바른 벽지, 막 칠해 놓은 페인트, 깨진 바닥을 보수한 마르지 않은 시멘트, 점토가 아직 굳지 않은 매끈한 토기, 하얗게 김이 나는 네모 반듯한 깨끗한 백설기….
너무 깨끗하고 순수해서 그냥 그대로 있어주기를 바라는 것!
왠지 어떤 흠집이라도 흔적이라도 남겨버리고 싶은 것!
성선설과 성악설이 떠오른다.
왜 깨끗함을, 순수함을 지켜주지 못하지?
그렇다면 그냥 두지 못하는 것은 성악설에 가까운 것인가?
인간의 본성에 대한 회의감이 들다가
문득 생각의 물구나무서기로 돌려 바라보니, 그렇게만 볼 것도 아니지 싶다.
예술성의 근본인 창의성이라는 렌즈로 바라보는 아량을 베풀어 보았더니, ‘인간의 악한 본성이란!’ 하며 부르르 했던 마음이 좀 말랑말랑해진다.
원시시대의 고대동굴벽화, 종이가 발명되기 전의 나무껍질이나 동물가죽에 새겨 놓은 목탄 그림, 어린 유아들의 크레용(때론 엄마의 립스틱) 낙서… 무엇인가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 형태로서 구현해내고 싶은 욕구는 창의성이라는 근사한 정당성을 얻게 된다.
수업시간 선생님 몰래 교과서 귀퉁이에 그리는 그림나부랭이, 기어코 반들반들 새 책상에 뾰족한 것으로 샤샤삭 그어놓은 책상타투, 화장실 벽면에 거침없이 그려 넣은 낯 뜨거운 야화들… 학교나 또는 이 학원가에 특히 난무하는 이 창의성의 발광, 창의성의 폭풍들. 폭풍성장 시기의 이 아이들은 키만 크는 것이 아니요, 여드름 수만 느는 것이 아니다. 창의성의 욕구도 솟구칠 터인데 풀 곳이 마땅치 않으니 그럴 수 있었을까?
다시 오민석으로 돌아가서(미안하다 오민석학생!)
오민석이 썼는지, 오민석의 친구가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학원 가려고 무거운 가방 짊어지고 걷다 보니
아직 마르지 않은 따끈따끈 한 시멘트 바닥이 눈에 딱 뜨인 것이리라.
아! 솟구치는 창의성의 에너지여!
오민석 또는 오민석의 친구는 이성의 끈을 슬쩍 놓아버리고 본성에 충실하게 되었으리라.
오민석. 기왕 쓰는 거 크게 또박또박!
오민석 또는 오민석의 친구는 어쩌면 오늘도 이 지점에서 잠시 멈추었다가 어느 학원으로 들어가겠지.
슬쩍 입가에 미소를 띠면서. 아니면 그 반대일 수도.
오민석이 썼는지, 오민석의 친구 녀석이 썼는지 알 길은 없지만 나에게 재미있는 단서를 제공해 줘서 이 글을 빌어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 학원가를 다닐 것으로 추측되는 오민석 학생 고마워! 만날 수 만 있다면 내가 햄버거 정도는 쏠 수 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