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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린 Oct 20. 2024

에피소드 1: 천사의 마지막 날

유진은 새벽의 정적 속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 창문 너머로 부드러운 햇살이 스며들어 방 안을 밝히고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에 자리한 무거운 기운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이불 속에서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이 일상이 의미 있는 것인지 스스로 묻고 싶었지만, 답은 없었다. 이대로 가도 괜찮을까, 그녀는 그렇게 자신에게 물으며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침대 끝에 앉아 머리를 쓸어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거실로 나오자 어김없이 깔끔하게 정돈된 공간이 그녀를 맞이했다. 탁자 위에는 어젯밤 마시다 남긴 차가운 커피 잔이 여전히 놓여 있었다. 유진은 잔을 들어 올렸다가, 찬 커피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듯 조용히 내려놓았다. 창문 쪽으로 걸어가 창을 열자, 찬 바람이 방 안으로 밀려들며 쌓여 있던 무거운 기운을 훑고 지나갔다. 그녀는 눈을 감고 그 바람의 감촉을 느끼며 잠시 마음을 놓아두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가슴속 깊은 곳에 자리한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탁자 위에 놓여 있던 핸드폰이 진동하며 화면에 알림을 띄웠다.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떠 있었지만, 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화면을 넘겼다. 그녀는 이미 그 전화들이 어떤 내용일지 알고 있었다.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 그녀의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들. 하지만 오늘은 어떤 전화도 받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오늘은 자신을 위해 중요한 하루가 될 예정이었다. 그녀는 가슴속에서 불안을 밀어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이들이 나를 필요로 해. 내가 아니면 누가 도와줄 수 있을까?” 


유진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스스로를 천사처럼 여기는 이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다. 그 기대와 찬사가 바로 자신을 지탱하는 힘이었기 때문이다.  

거울 앞에 서서 옷을 단정히 고쳐 입었다. 셔츠의 주름을 펴고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빗으며 거울 속 자신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 미소는 어딘가 어색했다. 억지로 만들어 낸 미소 속에는 불안과 고독이 뒤섞여 있었다. 그녀는 애써 그 미소를 유지하며 스스로를 설득했다. “난 오늘도 옳은 일을 하고 있어. 이 길이 맞아.” 하지만 그 말을 끝마치자마자, 거울 속의 자신과 눈이 마주친 순간, 미소는 금세 사라졌다.  

책상 위에 놓인 메모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종이 위에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 “미안해. 이것만은 너를 위해서야.” 


유진은 메모를 들고 한동안 바라보았다. 누구를 위한 말인지, 이 문장을 남긴 이유가 무엇인지 자신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한 마지막 변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메모를 접어 책상 서랍 깊숙이 넣었다. 서랍 속에는 이미 여러 장의 메모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지금까지 남기고 지우기를 반복한 수많은 생각들이 그 속에 묻혀 있었다.  

현관 앞에 놓인 작은 선물 상자를 들고 문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새 운동화가 들어 있었다. 이 운동화는 그녀가 며칠 전 만난 한 소년에게 줄 예정이었다.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도 밝은 웃음을 잃지 않았던 그 소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유진은 그 아이가 이 운동화를 받고 잠시라도 더 행복해지기를 바랐다.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 믿었다.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거리를 걸으며 유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각자의 일상을 이어가고 있었다. 직장으로 향하는 이들, 학교로 가는 아이들, 시장을 열기 위해 준비하는 상인들. 그녀는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이들을 돕지 않는다면, 이들은 어떻게 될까?” 


그 질문은 그녀의 가슴속에 묵직한 돌처럼 내려앉았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으며 그 생각을 떨쳐냈다. 


“난 이 일을 해야 해. 이게 내 사명이야.”  


저녁이 되어 유진은 봉사 활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피로가 몰려왔지만, 마음속에는 작은 성취감이 차올랐다. 누군가의 삶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이 그녀를 지탱하는 힘이었다. 하지만 오늘 밤은 평소와 달리 마음 한구석에 허전함이 자리했다.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어딘가에 균열이 생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  

유진은 마지막으로 한 통의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피곤한 목소리가 말했다.  


“유진 씨, 오늘은 좀 쉬세요. 너무 무리하시는 것 같아요.”  

유진은 잠시 침묵하다 부드럽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도와주고 쉴게요.”  

그녀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따뜻했지만, 그 속에는 비장한 결심이 담겨 있었다. 


상대방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무심히 대화를 끝냈다. 전화를 끊고 난 유진은 책상 위에 놓인 사진을 집어 들었다. 사진 속에는 그녀가 도와주었던 사람들과 함께 찍은 모습이 담겨 있었다. 다들 밝게 웃고 있었지만, 유진의 시선은 사진의 찢긴 가장자리에 멈췄다. 그녀는 손끝으로 그 자국을 천천히 더듬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밤이 깊어갔다. 유진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창밖에서는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며 스산한 소리를 냈다. 그녀는 이불을 끌어당기며 조용히 속삭였다. “이건 내가 해야 할 일이야.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는 거야.” 하지만 그 말을 되뇌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불안이 끊임없이 일렁였다.  


몇 시간 후, 아파트 단지에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고, 경찰들이 유진의 방으로 들어섰다. 방 안은 여전히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지만, 유진은 침대 위에서 싸늘하게 식은 채로 발견되었다. 그녀의 손에는 찢긴 메모 조각이 쥐어 있었다. 경찰은 현장을 조사한 뒤, 사건을 자살로 결론내리려 했다.  

다음 날 아침, 하진은 경찰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유진 씨가… 자살했다고요?”  


하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손에 쥔 전화기를 떨어뜨렸다. 유진이 자살할 리 없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강한 사람이었고, 남을 돕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사람이었다. 하진은 즉시 유진의 아파트로 달려갔다. 진실을 밝히기 위한 그의 여정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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