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진은 경찰의 전화를 끊고도 한참 동안 손에서 전화기를 놓지 못했다. 손끝은 얼어붙은 듯했고, 머릿속은 텅 빈 것 같았다. 유진이 자살했다는 소식은 믿을 수 없었다. 그녀가 그렇게 스스로를 소모하며 남을 도왔던 이유는 분명히 더 나은 미래를 향한 것이었다. 그런데 왜, 어떻게 그녀가 이런 선택을 했을까?
“절대 그럴 리가 없어...” 하진은 자신에게 속삭였다. 분명히 뭔가 잘못된 것이다. 그녀가 혼자 감당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왜 그걸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을까? 그는 눈을 감고 잠시 숨을 고르려 했지만, 가슴 깊이 파고드는 후회와 의문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하진은 곧바로 외투를 걸치고 유진의 아파트로 향했다. 몇 년 전 그들과 연인 사이였을 때 종종 찾아갔던 그 아파트. 두 사람은 감정의 차이로 헤어졌지만, 그래도 친구로 남으려 했다. 그러나 유진은 거리를 두려 했고, 하진은 그녀의 고집을 더는 꺾지 않았다. 그 선택이 지금의 결과로 이어진 것일까?
유진의 아파트는 여전히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침대는 정리되어 있었고, 거실의 모든 물건은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이 정돈된 공간이 오히려 더 불안하게 느껴졌다. 마치 그녀가 마지막 순간까지 누군가에게 깔끔한 이별의 흔적을 남기려 한 것처럼 보였다.
하진은 거실을 천천히 둘러보며 그녀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탁자 위에는 어젯밤 마시다 남긴 찬 커피가 있었다. 그녀는 그날도 자신처럼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창문을 열어 바람을 들이마셨다. 차가운 공기가 방 안을 채우며 정적을 깨뜨렸지만, 하진의 마음속 불안은 오히려 더 깊어졌다.
하진은 유진의 아파트 거실에서 서성거리며, 과거의 기억들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복잡했다. 그들은 연인이었지만, 동시에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멀어졌다. 유진은 늘 자신을 소모하며 남을 돕는 데에 몰두했고, 하진은 그런 그녀를 사랑하면서도 지쳐 있었다.
몇 년 전 어느 밤, 하진과 유진은 말다툼을 했다.
“너는 왜 너 자신을 좀 돌보지 않는 거야?”
하진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렇게 모든 걸 네가 감당하려고 해?”
유진은 피곤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감정이 담겨 있었지만, 동시에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게 나야, 하진. 내가 아니면 누가 그들을 돕겠어?”
“그럼 나는?”
하진은 답답한 듯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난 네 옆에 있는데, 넌 날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아.”
유진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침묵했다. 그녀는 하진을 사랑했지만,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하진도 알고 있었다.
“하진, 넌 강해. 나 없이도 잘할 수 있어.”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 말은 그때 하진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에게 유진의 말은, 자신이 그녀에게 필요 없는 존재라는 선언처럼 들렸다. 그렇게 두 사람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한 채로.
그의 시선이 책상 서랍에 멈췄다. 서랍을 열자 안에는 여러 장의 메모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메모들을 천천히 넘기다, 눈에 익은 문구가 적힌 메모를 발견했다.
“미안해. 이것만은 너를 위해서야.”
하진은 메모를 쥔 손을 꽉 움켜쥐었다. 이 말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무엇을 위한 것인지. 그녀는 왜 이토록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하려 했을까? 하진은 메모를 주머니에 넣고 방을 더 둘러보기 시작했다.
거실 벽에는 유진이 도와주었던 사람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사진 속 사람들은 환하게 웃고 있었고, 유진도 그들 옆에서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중 한 사진의 가장자리가 찢겨 나간 흔적이 보였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사진 속의 한 인물을 제거한 것이 분명했다.
하진은 조심스럽게 사진을 떼어 들고 가방에 넣었다. 찢긴 조각의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분명 이 사진은 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녀가 지우고 싶어 했던 인물, 혹은 감추고 싶었던 비밀이 사진 속에 있었을 것이다.
그는 침대 옆에 놓인 유진의 핸드폰을 발견했다. 다행히 경찰이 가져가지 않은 듯했다. 핸드폰을 열어보니 가장 최근의 통화 기록이 눈에 들어왔다. 강민. 이름이 낯익었다. 강민은 유진이 노숙 생활을 하던 시절 도와줬던 청년이었다. 유진은 그에게 많은 것을 베풀었지만, 언제부턴가 강민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하진은 핸드폰을 쥔 채 고민하다가 강민에게 전화를 걸기로 결심했다. 전화가 몇 번 울리자 강민이 피곤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누구시죠?”
“유진 씨 친구입니다. 강민 씨 맞으시죠? 유진 씨와 마지막으로 통화하셨더군요.”
강민은 한동안 말이 없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유진 누나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요?”
하진은 잠시 망설이다 결국 대답했다.
“유진 씨가... 어젯밤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강민이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 그럴 리가 없어요. 누나가 왜 그런 선택을 했죠?”
강민의 목소리는 충격과 혼란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속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느껴졌다. 하진은 그 말을 곱씹으며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왜 그런 선택을 했냐고?” 아직 강민에게 유진의 죽음이 자살이라고 말하지 않았는데, 그는 마치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반응했다.
“그런 선택이라뇨..... ?” 하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강민은 답을 회피하듯 숨을 내쉬더니, 느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직감적으로 그렇게 생각이 들었어요.”
직감? 하진의 마음속에 경계심이 일었다. 유진의 죽음에 대해 아직 경찰로부터 구체적인 설명도 듣지 못한 강민이 어떻게 자살을 떠올렸을까? 그의 반응은 의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하진은 강민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충격과 혼란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강민이 이 사건과 무관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가 유진과 마지막으로 대화한 인물이라는 사실이 중요했다.
“어젯밤에 유진 씨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시나요?” 하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강민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누나가 저한테 찾아왔어요. 평소와 달랐어요. 불안해 보였고, 저한테 ‘고맙다’고 했어요. 근데 그 말이 이상했어요. 마치 이제 끝인 것처럼...”
“끝이라니요? 구체적으로 뭐라고 했나요?”
강민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이제 내가 없어도 넌 괜찮을 거야.’ 그렇게 말했어요.”
하진의 가슴이 순간 조여드는 듯했다. 유진은 항상 자신이 누군가에게 필요하다고 믿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자신이 없어도 괜찮다는 말을 남겼을까?
하진은 통화를 마치고 다시 한번 사진 속 찢긴 자국을 떠올렸다. 강민이 정말 이 사건과 무관할까? 아니면 유진이 강민과의 관계에서 느꼈던 감정이 그녀를 파멸로 몰고 갔던 걸까?
사진 속에서 사라진 인물이 누구인지 밝혀내는 것이 사건의 핵심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진실을 찾기 위해, 하진은 유진의 과거를 파헤치기로 결심했다. 그녀가 남긴 마지막 단서들 속에 두 사람의 관계와 숨겨진 진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창밖에서는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며 스산한 소리를 냈다. 하진은 그 소리를 들으며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이번엔 놓치지 않겠어. 유진, 네가 왜 그랬는지 꼭 알아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