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유 Jun 18. 2024

스물 일곱(上)

하찮고 소중했던 그 때의 기억

몇 년 간 연속으로 고3 담임만 하다가, 올해는 1학년 담임을 맡게 되었다.


우리 학교는 2학년 때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가는데, 이미 입학식날부터 내년에 갈 수학여행이 기대된다며 두근두근 기다리는 아이들이 있다. 참 귀여우면서도 괜히 덩달아 설레는 기분이 들곤 한다.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나는 아주 긴 시간 동안 어떤 순간을 기다려 온 적이 있다.


스무 살이 되는 순간도 아니고, 첫 연애를 하는 순간도 아닌, 바로 '스물 일곱'이 되는 순간이다. 어릴 때부터 드라마에, 영화에 나오는 예쁘고 프로페셔널한 여자 주인공들을 보면 왜인지 그들이 스물 일곱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아니 그런 생각을 했다기보다 그냥 '멋진 커리어우먼 = 스물 일곱' 이라는 비논리적인 공식이 내 머리 속에 저절로 생겨났다고 보는 것이 어쩌면 더 타당하겠다.


아무튼 어째서인지 내 안에 자리 잡은 '스물 일곱 여성'의 완벽한 이미지로 인해 어릴 때부터 나이 먹는 것이 너무 즐거웠었더랬다.(과거형의 총집합)


스무 살이 넘어가면서 성인이 된 친구들은 반 사십, 반 오십이라는 해괴망측(!!)한 말들로 나이 먹어가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며(지금 생각하면 우습기 짝이 없지만) 술 한잔씩 꺾곤 했는데 그때마다 그들 사이에서 나는 드디어 한 살을 더 먹었다는 기쁨에 취해 있었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임용시험을 준비하며 이렇다할 성과없이 스물 넷, 다섯, 여섯이 되어가자 조금씩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이룬 게 없는 채로 나이를 먹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내가 감히 스물 일곱이라는 엄청난 타이틀을 가지게 될까봐서였다.


조급한 마음을 안고 미친듯이 공부했다. 그토록 기다렸던 나의 스물 일곱을,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내가 더럽힐 수는 없었다. 정말로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그야말로 죽을 힘을 다해 공부한 끝에 - 거짓말처럼 스물 일곱이 시작되는 2011년 1월. 결국 시험에 합격하고 말았고.......


그토록 고대하던 스물 일곱의 문을 화려하게 열어 젖혔다.


원하던 직업을 가지게 된 스물 일곱.

부모로부터 경제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독립한 하나의 개체.

가슴 시린 연애를 하는 청춘인 동시에 그 누구보다 아이들에게 열정적인 교사.


내가 꿈꾸던 모든 것을 펼쳐보일 스물 일곱이, 바야흐로 시작된 것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