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통의 김장에 담긴 고마움

어쩌다 김장하는 날

by 허정호

한통의 김장에 담긴 고마움

딸은.

친구 외할머니 댁에서 김장을 하는데, 할머니가 직접 키운 배추를 보내주시겠다는 연락을 받았단다. 배추는 이미 간이 되어 있고, 직접 키운 무와 젓갈까지 함께 보내주신다 했다. 전화기 너머로 전해지는 딸의 목소리에는 고마움과 설렘이 섞여 있었다.

토요일 아침, 아내와 나는 새벽시장으로 향했다. 시장 입구 큰 도로 양옆에는 트럭과 자가용이 빈틈없이 늘어서 있었다. 주차할 자리를 찾느라 몇 바퀴를 돌다 겨우 한 대가 빠진 자리에 차를 밀어 넣었는데, 택시기사가 내려 택시 자리에 주차했다며 큰소리를 쳤다. 아침부터 진이 빠졌지만, 시장의 기운은 그런 걸 잊게 만들었다.

시장 안쪽에는 젊은 상인들이 재빠르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큰길 인도 한쪽에는 집에서 직접 키운 채소를 들고 나온 예순, 일흔쯤 되어 보이는 아줌마들과 할머니들이 빼곡히 앉아 있었다. 손님이 눈길만 줘도 손목을 붙잡으며 하나라도 더 팔려고는 분주했다. 중앙시장 안쪽은 비교적 한산했지만, 인도 쪽은 사람이 너무 많아 시장바구니가 사람들 발목에 걸리지 않게 조심조심 끌어야 했다.

난전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나오는데, 쟁반에 수북이 쌓인 새우를 파는 아줌마가 “어제보다 많이 내려서 싸다”라고 했다. 어제는 3만 원이었는데 오늘은 2만 원이란다. 아내는 2만 원어치를 받아 들고는, 다음 사람에게 반 상자를 2만 5천 원에 파는 걸 보고 억울하다며 봉지를 다시 내밀었다. 그러자 아줌마는 두 손으로 새우 한 움큼을 더 집어넣어주었다.

마른 청각 한 봉지, 갓 한 묶음, 무 여섯 개를 사고, 적다 싶어 다시 오천 원을 더 주고 다섯 개를 더 샀다. 큰길 인도로 나오면서 손질해 놓은 쪽파를 사고, 아침에 먹을 도토리묵 한 모와 노랗게 잘 익은 단감도 샀다.

아침을 먹고 새벽시장에서 산 김치 양념거리들을 시골집 마당으로 가져갔다. 무를 깨끗이 씻어 물을 빼고, 찹쌀죽은 야외용 버너 위에 큰 솥을 올려 끓인 뒤 식혔다. 청각, 쪽파, 갓은 적당한 크기로 잘라 비닐봉지에 담았다. 아내는 마당에서 모든 걸 하니 일하는 게 즐겁다며 연신 좋아했다.

준비한 재료를 집으로 가져온 아내는 큰 대야에 찹쌀죽과 고춧가루, 어제 미리 끓여 식혀둔 육수를 붓고 믹서에 간 새우, 찧은 마늘과 생강, 매실진액, 젓갈을 촉으로 적당히 넣었다. 잘라온 양념거리들을 넣고 큰 주걱으로 한참을 힘차게 저은 뒤, 시원한 베란다로 옮겼다. 집안은 매운 젓갈 냄새로 가득 차 문을 모두 열고 환기를 시켜야 했다.

일요일 아침, 아내는 급히 백화점에서 산 스카프와 소매 없는 겉옷(조끼) 주머니에, 고맙다는 뜻으로 용돈을 조금 넣은 복주머니를 챙겼다. 먼 거리를 혼자 보내기 걱정된다고 하자, 딸은 괜찮다며 친구 외할머니 댁으로 떠났다. 점심은 휴게소에서 사 먹겠다며 필요 없다고 했지만, 아내는 “코로나로 피곤한 세상, 먹는 것만은 조심해야 한다”며 유부초밥을 만들어 주었다.

친구 외할머니 댁에서 돌아온 딸은 김장거리를 가득 안고 들어왔다. 할머니가 옷이 잘 맞는다며 무척 좋아하셨다고 했다. 담은 김장 김치 두 통, 총각김치 한 통, 이틀 동안 끓였다는 육수 반 통, 무 몇 개, 갓 조금, 그리고 간한 배추 20킬로그램을 쇼핑카트에 담아 개선장군처럼 가져왔다. 생각보다 배추 양이 적긴 했지만, 새벽시장에서 산 무가 많으니 김치 사이사이에 넣으면 충분하겠다는 게 아내의 판단이었다.

오후에 함께 김장을 하자던 아들은 미열이 있다며 슬쩍 빠졌다. 아내와 나는 양념을 비벼 배추 속에 넣었고, 딸은 잔잔한 심부름을 맡았다. 양념한 배추 한 층, 무 한 층을 올려 다섯 줄을 맞춰 한 통을 채웠다. 그렇게 김장은 순식간에 네 통을 채우며 끝났다.

오전에 삶아 둔 수육과 막 담근 김치로 저녁을 먹고, 결석한 아들에게도 몫을 챙겨 배달했다.

양념이 너무 많이 남았다. 김장을 더 할지 말지 잠시 고민하다가, 다음 날 시골집 마당에 심어둔 무를 뽑아 무김치를 담그고, 아직 어리지만 텃밭에 남아 있던 배추도 뽑아 다시 김장을 하기로 했다. 이렇게, 김장은 하루가 아니라 여러 날 이어졌다.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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