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냉장고 파먹기

텅 빈 냉장고 채워지지 않는 마음

by 허정호

텅 빈 냉장고 채워지지 않는 마음

장을 볼 때면 늘 아내와 함께였다.

하지만 부엌을 '선물'로 받은 그날 이후, 아내는 장보기에 점점 무심해졌다.

가끔은 "혼자 다녀와" 하더니, 어느새 나는 마트의 단골이 되었다.

마트를 빙 둘러 한 바퀴.

내 눈에 익숙한 것들만 카트에 담았다.

양배추, 양파, 당근, 두부, 계란, 사과 등

아내는 매운 음식이나 고기를 즐기지 않기에, 내가 식탁을 차리는 대로 잘 먹어줬다.

그게 고마웠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가 주방으로 들어오더니 냉장고 문을 벌컥 열었다.

야채칸에서 무언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한 달 전 언니 집에서 가져온 공심채.

처음 하루만 올리브유에 볶아 먹고, 봉지째로 썩고 있었다.

이파리는 물컹거리고, 줄기는 흐물흐물.

사천 지인으로부터 받은 쑥갓도 노랗게 색이 변했고,

열무김치는 윗부분이 하얗게 피어서 올라앉아 있었다.

부추, 대파... 시골집 텃밭에서 가져온 귀한 것들이 하나같이 봉지 안에서 흐물흐물 숨이 죽어가고 있었다.

아내는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냉장고 파먹고 나서 마트를 가야지! 이게 다 뭐야!"

잔소리가 시작됐다.

나도 참지 않았다.

"냉장고 있는 줄 알았으면 반찬을 만들든지, 해달라고 하든지!"

말은 점점 거칠어졌고, 우리는 그 작은 부엌에서 한바탕 소리를 주고받았다.

사실, 아내가 꺼낸 것들 대부분은 내가 좋아하지 않는 재료들이었다.

먹기 싫은 날은 모른 척 지나치고, 가끔은 몰래 버리기도 했다.

아내는 그걸 눈치챘던 걸까.

오늘, 결국 냉장고를 열어젖혔다.

냉장고를 털어낸 뒤,

빈 냉장고는 생각보다 공허했다.

다시 채워야 했다.

나는 아내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아내는 “알아서 사와” 했다

나는 마트로 달려갔다.

이번에도 역시 양배추 양파 등 등,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채웠다.

그리나, 아내는 아무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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