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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마음아 Sep 08. 2024

착한 딸이 되고 싶지 않았다.

당신처럼 살기 싫어 도망치고 싶었다.

어머니, 내 그립고 소중한 친구... 어머니로 있어줘서 감사했습니다.

점심시간 도시락을 챙겨 오지 않는 날이면 나는 뜀박질을 해서 집으로 달려오곤 했다. 그러면 말끔하게 내 어머니가 차려놓으신 맛있는 밥상이 아랫목에 차려있었다. 달리 소시지며 고기반찬은 아니더라도 묵은지며 총각무 같은 시골밥상은 어린 나였지만 꿀맛이었다. 학교와 집까지 샛길로 오면 700미터 정도는 되었다.  어린 나이에 40분의 점심시간은 체력단련의 시간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주로 밭으로 나가 농사일을 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많은 논이며 밭을 사시사철 쉬지 않고 달려온 어머니셨다.

어머니의 작품은 풍성하고 화려했다. 가을걷이 날이 되면 엄청난 수확으로 돌아오곤 하여 그날의 수고로움을 덜어주곤 하였다.


과수원이며 논과 밭 수백 평이 넘는 땅을 일손도 없이 그 여자와 남자가 해냈다. 굵직굵직한 일은 아버지의 몫이었고 나머지 종자를 심고 풀을 메고 잔손질이 많이 가는 일은 어머니와 내 손을 거쳐갔다. 아버지의 호령 한마디에 일사천리로 움직여야 하는 어머니를 보며 그렇다고 그 남자가 뭔가를 애써 잘해주거나 특별할 것 없는 삶에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자식들은 전부 출가를 했고 두 사람 정도의 살림이면 충분한 것을 여전히 끙끙 앓으면서 힘든 농사일을 해치우고 계셨다. 이 쌀가마니는 첫째 딸냄이 거, 배추는 둘째 딸내미... 생일날이나 한번 올까 말까 한 두 딸내미들을 위한 채비를 벌써부터 해두시는 가엽은 우리 어머니.


배다른 형제라서 그랬을까? 나와 언니들은 성향이 너무나도 달랐다. 한번 왔다가도 고운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나이도 나보다 20살은 더 많아 보이는 그 여자들은 내 집에만 왔다 하면 잔소리를 쏟아내기 바빴다. 그러면서 한다는 소리가 "너는 내 동생이니까!"였다. 그 당시 배다른 형제라는 것을 알았다면 쌩하니 모른 채 했을 테지만 그때 당시는 언니들이 나의 잘못한 행동들을 뭐라고 하는 줄로만 알았지 시샘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 내 나이는 이제 막 국민학교를 들어갈 나이로 기억한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언니들은 독불장군 아버지보다 무능력한 어머니를 더 싫어했던 것 같다. 자기가 학교를 못 다녔던 원인도 어머니 탓이었고, 자기 자식들 건사도 못할 거면서 왜 나았냐는 원망 섞인 목소리를 달고 살았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던 그날도 전남편의 시댁식구들을  붙들고 한다는 소리가 가관이었다고 한다.

"저 못돼 먹은 년은 어머니 살아생전 집에 한번 왔다갈 생각도 못한다는 식으로 저를 이 집에서 얼마나 고생고생하며 길러냈는데..."온갖 욕을 다했다는 말을 듣고 상을 치러 놓고 돌아온 다음 날 난생처음으로 그 여자들과 맞섰다.

  " 그래 나는 못돼 먹은 딸이었음을 인정한다." 

"그런데 더 못 참겠는 건 우리 엄마다. 불쌍한 우리 어머니..."

"당신들이 하필 내 어머니 뱃속으로 나왔다는 게 참으로 부끄럽고 치가 떨린다."

"앞으로 너는 내 언니들이 아니니 관심 끊고 잘 살아라"라고 했다. 

한치의 미련도 남아있지 않았다. 조금 속이 후련했다. 10년 먹은 채증이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날 역시 형제는 부모와 같지 않구나를 알게 되었다. 나는 그녀에게서 한 번도 좋은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서울 상경해서 혼자 애를 먹으면서도 동생이라고 김치 한 번을 갖다 주는 일도 없으면서 욕은 욕대로 늘 듣고 살아야 했다. 결혼하는 날 한복을 맞출 때도 더 해주려고 안타까워해야 할 언니임에도 한복도 맞춰주기 아깝다는 식으로 말하는 언니를 보면서 긴가민가하는 감정들이 깡그리 정리되는 것을 느꼈다.

뭐든지 동생이! 동생이 먼저! 해야 하지 않느냐는 당위성에 대해서만 나를 죄인으로 몰고 갔다.


당신은 말로만 언니, 형제라고 할 뿐 단 한 번도 내가 동생이었던 적이 없었다는 것! 을 그날에서야 알게 되었다. 애를 낳고 산후조리도 제대로 못했다. 아이 셋을 혼자 키울 적에도 한 번도 형제라는 사람들이 왔다 적이 없다. 전화를 하면 너는 대체 뭐 하는 년이냐고 된소리를 들어야 했다. 어느 한 사람 사는 모습에는 궁금해하지 않았으면서 불효를 빙자로 나는 정말 나쁜 년이 되어 있었다. 그럴수록 나는 엄마와의 거리가 멀어져 갔다. 가고 싶은 마음, 보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야 했다. 나는 불효 자니까 나는 그런 사람이니까...


늘 부정적인 말을 듣고 자란 사람들이 더 어긋나는 경우들이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낙인효과라고 한다. 낙인효과(烙印效果)는 상대방에게 부정적으로 무시당하거나, 치욕을 당한 경우에 즉, 상대방에게 낙인이 찍힌 경우에 부정적인 영향을 당한 당사자가 부정적으로 변해가는 현상을 일컫는다. 그래서 죄인이 되나 보다.


나 역시 그랬다. 나는 착한 사람은 글러 먹었다며 더 마음을 굳게 닫아 버렸다.  애초에 어머니처럼 살기 싫다며 늘 어른이 되면 이 집구석을 뛰쳐나가야겠다며 벼르고 별렀다. 공부를 열심히 한 계기도 집 밖을 나가기 위해서였다. 취직만 하면 멀리 떠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디든 혼자 살고 싶었다. 한 순간도 편할 날이 없는 이 공간이 너무 싫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달랐다. 언제나 나를 긍정적으로 대해주셨다. '너는 잘하니까', '우리 딸은 씩씩하니까'라며 늘 기다려주시고 치켜세워 주셨다. 늘 부족한 부분만 찍어내리던 아버지와 언니들과는 달리 어머니는 내가 잘하는 것, 잘하는 점을 칭찬해 주셨다.  낙인효과의 정반대인 피그말리온 효과를 어머니를 통해 느끼게 된다. 피그말리온 효과는 타인에 대한 기대나 관심이 해당 타인에게 긍정적인 결과를 나타내주는 현상을 의미한다. 어머닌 항상 나를 좋은 길로 인도해 주셨다.  그녀의 조용한 칭찬은 나의 자존감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집을 나오면서도 마음에 걸렸던 부분은 어머니였다.

그렇게 살아오셔서 그런 줄만 알고 살다 간 사람. 곱고 여린 사람. 남에게 싫은 소리를 내지도 못하고 잔잔하게 미소 짓던 사람... 동생들의 배신에도 묵묵히 속만 달래던 그 사람.

나는 그녀처럼 살기 싫었다. 좋은 건 좋고 싫은 건 싫다고 말하며 내 삶을 살아가고 싶었다.

그렇게 좀 가볍고 깔끔하게 살다가고 싶다.


나와 함께 한 시절을 넘어와 준 곱고 귀한 사람으로 남아있다.

고맙습니다. 내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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