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가족사, 아버지 그리고 자식
모든 문제의 원인이 나로부터 시작된다.
조선 제일의 비운의 왕세자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사도세자일 것이다.
아버지 영조와 부인 영빈 이 씨에서 태어난 비운의 아이 사도세자는 부친 영조와 극심한 갈등을 겪었고 이 과정에서 결국 정신질환을 얻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수많은 주변 사람들을 참혹하게 살해하는 등 수많은 비행을 저지른다. 이를 참지 못한 아버지는 결국 아들을 참수한다. 아버지의 명으로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사망에 이른 사건이 바로 임오화변이다. 사도세자는 소위말하는 금수저이자 엄친아였다. 똑똑하기 이루 말할 데 없었으며 효와 예에 바르고 총명한 아이였다. 어렵게 얻은 아이였기에 아버지인 영조도 어린 세자를 몹시도 귀여워하였고 총애했다고 한다.
그런 그 부자지간을 비운으로 만든 가장 큰 원인이 바로 태어난 지 100일도 안 된 세자와 생모 영빈 이씨를 분히 한 사건이며 세자에 대한 기대와 욕심이 너무 컸던 나머지 세자를 엄격하게만 키워낸 것이 두번째 이유가 아닐까한다.
눈에 넣어도 아까운 아이, 어린 시절은 엄마, 아빠 소리만 들어도 칭찬 일색이고 꿀이 뚝뚝 덜어지다가 어느 순간 나이가 들수록 부모의 기대가 아이의 재량보다 넘칠 때가 있다. 사도세자 역시 마찬가지다. 청소년기에 이르자 칭찬보다 비난과 질책이 난무해 버린 아버지 영조. 아들의 기질과 성향을 기다려주고 헤아리기보다 자신의 성격대로 키워낸 자식
그럴수록 아버지 앞에서 어떤 답을 해야 할지 몰라 대답을 우물쭈물하고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는 선택불능상태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런 아들의 모습에 더욱 실망하기만 한 아버지는 아들의 모습을 정녕 이해하거나 따뜻하게 대해주지 않고 갈구기만 하니 악순환이 계속된 것이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 세자가 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싹틀 리가 없다.
나에게도 아버지란 존재는 그렇게 기억된다. 나의 기질과 아버지의 기질은 너무나도 달랐다. 매사 진취적이고 불도저 같은 아버지의 성격상 미성숙하고 발달이 더딘 아이의 모습은 복장이 터질 것 같이 답답해 보였을 것이다. 아버진 일적인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리 만큼 우악스럽고 악착같은 면이 있었다. 손이 크고 뚝심으로 밀어붙이는 성격이셨던 걸로 기억한다. 아버진 뚫고 나가는 힘이 강하셨다. 그 역시 누구보다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들었다. 양반댁 두 번째 부인의 자식이었던 아버지는 그 집안의 골칫덩이리로 여겨졌다. 양반댁이지만 본연히 정실부인이 따로 있고 첩의 자식이었던지라 그 집에선 찬밥덩이리인 것이다. 그런 아버지는 그 동네의 머슴이었다. 한 푼 두 푼 일해서 모은 것으로 재 넘어 자갈밭을 사들이고 남들이 다니지 않는 길을 냈으며 그렇게 열심히 모아 논과 밭 산을 사 모으셨다고 들었다.
물론 시간은 그를 부자로 만들어 주었다.
그 과정에서 아버진 그저 무식하고 용감한 소처럼 일했던 사람이라고 한다. 나는 그런 아버지가 자랑스럽다. 하지만 자식을 양육하거나 부인과의 소통면에서는 잼뱅이었다. 마음은 따스하지만 역정이 나면 물, 불 안 가리고 자기 할 말 다하고 자기식대로 끼워 맞춰 놓아야 직성이 풀렸던지라 언제나 엄마와 나는 숨죽여 살아야 했다.
클 때는 아버지를 무척 원망하면서 컸다. 이해를 시켜주기보다 언제나 윽박질러 행동하게 만들었으니 잘잘못을 따져 헤아리기보단 무조건 내가 100% 잘못한 것이어야 했다. 그런 모든 상황들이 이해가 안 가고 억울하기만 했다. 그러한 시간동안 나는 혼동과 갈등이 내면에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어떤 결정도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이것이 맞는 것이지 저것이 맞는 것인지 몰라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맥사에 자신이 없고 모든 눈들이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누군가에게 내 의견을 피력하기보다 그의 의견에 따르는 것이 맞다는 생각으로 살았다. 그런 습관이 오래 지속됐다.
그렇게 오랜 시간 길들여져야 했다.
술 마시고 와서 행패를 부리는 아버지, 한참을 어디선가 스트레스를 받고 오면 집에서 약한 어머니와 나는 그 삶의 기분에 따라 좌지우지당하는 게 싫었다. 국민학교 전반적으로 두렵고 무섭고 피하고 싶었던 존재가 아버지다. 나 역시 사도세자처럼 비뚤어진 청소년시기를 겪어내야 했다. 마음은 당신이 내 속을 좀 봐주시면 안 되나요? 말은 이렇게 해도 내 맘은 그런 게 아닌데도 아버지의 막무가내식 발끈에 점점 더 어긋나가는 부녀지간이 되어야 했다. 나는 이번만큼은 지고 싶지 않았다. 지긋지긋한 일상을 끝내고 싶었다.
그렇게 내 속에서 불신과 증오가 피어오르면서도 간혹 가다 보여주는 따스한 정 때문에 미워할 수도 없는 양가감정에 혼란스러웠다. 아버진 좋은 사람일까? 나쁜 사람일까?
문제풀이가 서툴렀고, 타인의 감정에 대해 읽어 보려는 세대가 아니었다. 그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아니 그가 그의 어린 시절에 살아남아야 했던 가족사는 더욱 치열했을 것이다. 못돼먹어서 그가 그런 행동을 취했던 것은 아니라 그가 그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으며 한번도 온전한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기에 서툴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시의 자식들이 서당에서 글자깨나 외울 때 아버진 들로 산으로 나무를 해대며 다니는 일이 전부였던 것이다. 첩의 자식은 공부는 얼토당토 안은 일이었으리라. 어쩌면 사랑으로 지은 밥이 아닌 눈칫밥을 먹고 사는 것이 더 많았을 것이다.
아버지가 짊어지고 온 운명이다. 아버진 똑똑한 분이셨다. 시절을 잘 못 타고 나온 비운의 아이다. 나는 그를 인간으로서 이해한다. 어머니가 아프실 때 몸소 약재를 대려 어머니 앞에 투박하게 놓아둔 손길에서, 감을 따서 깎아 처마에 대롱대롱 매달아 놓고 한 알 먹으라며 주시던 말없는 손길에서, 처자식 굶기지 않으려고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니며 장사하고 그 돈으로 땅을 사서 모았던 그가 혼자 잘 먹고 잘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으리라. 힘차게 살라며 인형이나 쥐어줄 법한 딸자식의 손에 대나무를 부드럽게 갂아 만든 활이나 창을 손에 쥐어주며 산으로 들로 나가 뛰어다니라 하신 아버지의 놀잇감은 세상 어디에도 없던 진귀한 물건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일터에서 놀았고 배웠다. 톱질과 낫질 도끼질을 해대며 온천지를 돌아다녔다.
울음보가 터지면 세월아 내월아하고 울던 나에게 부리부리한 두 눈을 부릅뜨며 터져 나오던 내 눈물을 한방에 제압시키던 그에게서 나는 두 가지를 배웠다.
첫째. 울 일은 아무것도 없다.
둘째. 울기보다 방법을 배워라! 나아가라.
그땐 그의 호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 감정을 감정대로 분출하며 살지 못한 것만 억울해했다.
하지만 아버지... 섬세하기는 커녕 타인의 감정에 무심한 아버지라도 가정만큼은 든든하게 지켜주시던 모습, 어머니를 돌보시던 모습들이 그의 숨겨진 진심임을 알게 되었다.
무식했고 용감했던 내 아버지라도 TV에서 이산가족 찾기라든지 뭔가 아픈 가족사에 대한 드라마를 보시기라도 하시면 소 같은 눈망울에 닭 똥 같은 눈물을 소맷자락으로 몰래몰래 훔쳐내신 아버지의 뒷모습을 나는 기억한다.
그렇게 내 아버지의 오후가 저물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