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했던 모든 순간이 다 부재하였다.
그날은 폭풍이 몰아쳤다. 한순간에 모든 걸 다 쓸어 버릴 듯한 대단한 위력이었다. 국민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는 여름으로 기억한다. 하나, 둘 교정 문 앞에 부모님들이 모여들었다. 우산을 씌워주거나 차에 태워 내 아이의 젖은 옷과 얼굴을 닦아 주시는 모습이 보였다. 두리번두리번 둘러봐도 내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처음으로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학교를 오고 가던 나도 그날은 그 모습이 그렇게 부러웠다. 가장 위력이 센 태풍 같아 보였다. 학교와 집사이는 대략 1킬로 남짓. 길다면 길고 짧다면 또 짧은 거리다. 하지만 그날은 내 인생에서 가장 긴 거리였다. 거센 바람은 갈대며 나무들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키도 작고 힘도 없는 아이는 공포감이 밀려왔다. 자칫 잘못하면 날아갈 지경이었다. 아무도 없는 호수가 옆 길. 나는 길게 난 갈대며 풀을 두 손으로 움켜잡고 필사적으로 한 발 한 발 걸음을 옮겼다.
아이는 외롭다기보다 무서웠다. 무의식적으로 죽지 않으려고 안감힘을 쓰며 집으로 향해 걸었던 것 같다.
조금은 화도 났다. 엄마는 왜...
한참을 걷고 있는데 버스 하나가 내 앞에 섰다. 그 당시 마지막 안내양이 있는 버스였을 거다.
"어디까지 가니? "
" 타고 가렴"
"괜찮아요. 다 왔어요"
안내양과 버스기사님의 마음이 어린 나이에도 따스하게 느껴졌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집에 도착하자 엄마가 보였다.
어머니는 일부로 그러신 게 아니다. 그저 모를 뿐...
그랬을 거다.
인생을 살면서 그날의 기억은 자산이 되었다. 죽을 것처럼 힘든 상황에서도 내가 잡초처럼 일어날 수 있었던 힘은 혼자서 헤쳐나갔던 어린 날의 기억들이 존재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는 건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지는 거다.
이건 도저히 어렵고 힘든 일이어서 못해라는 말이 입 밖으로 밀려 나오려고 할 때마다 순간 행동이 빠른 이유도 그것이었다. 기억! '이 보다 더 어려운 고비도 스스로 넘어왔잖아'가 몸에 밴 탓이다.
부모님의 부재는 고통이 아니라 대부분은 나에게 독립과 자립의 기회로 이어졌다.
하지만 나에게도 그립고 외로운 순간은 있었다.
아이를 낳던 그 순간에는 나도 엄마가 필요했다. 무섭고 두렵고 가장 의지하고 싶었던 순간은 아이를 낳고 기를 때였다. 따스한 공깃밥에 김치를 얹혀 주시던 어머니의 밥상이 가장 그리웠다.
조리원에서도 아니 집에서 조리를 할 때도 혼자서 아이들을 건사해야 했다.
그 그리움의 빈 공간은 고스란히 남편의 몫이었다.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빈 공간을 나는 타인에게서 찾아왔는지 모른다. 늘 다툼의 원인이 되었다. 더 해주면 안 되냐고, 더 채워주면 안 되겠냐고...
나의 빈 공간을 타인의 사랑으로 채우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것이 마치 사랑인 것 마냥
그렇게 나는 사랑에 대하여 많이 엉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