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근원과 그의 대척점
입시생들이 많이 듣는 말 중 하나가 학습 공간과 휴식 공간을 분리하라는 말 일 것이다. 나는 이를 인생에도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쉬어야 하는 공간은 그 어떤 것으로부터든 단절되어 있어야 한다. 따라서 나는 집도 쉴 수 있는 공간이라 보지 않았다. 집에선 많은 일들이 있었다. 아버지의 우발적 폭력으로 유리창이 깨지고, 칼부림을 하고, 쓰러지고, 나는 실신하고. 그런 상황들이 자꾸 떠올랐다. 내 방을 아무리 내 흔적들로만 채워도 방 밖에서 나는 소리들에 머리를 헤집었다. 집에 있어도 '집'에 가고 싶었다. 다들 그런 경험 한 번 쯤은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병원에 입원해있는 동안 자취에 대한 생각을 구체화했다. 나가야 하는 이유, 나갔을 때의 기대, 고정 지출, 거리의 융통성 등을 고민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 전에, 이 병동에서도 이미 충분히 쉬는 것 같은데 굳이 나가야 할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밥도 세끼 다 영양가 있게 먹고, 사람들과도 화목했다. 미술 프로그램은 흥미, 적성에 맞아 떨어져 굉장히 즐거웠다. 스테이플러 심이 없는 책을 읽고 감상을 적었다. 때때로 공부하는 것도 행복했다. 그렇다. 나는 행복했다. 가족이 없는 곳에서, 그 누구도 나를 알지 못하는 곳에서야 나는 비로소 행복을 느끼고 말았다.
나는 그 감정을 인지한 직후 내 기분을 직시하려 노력했다. 이 감정의 근원과 그 대척점에는 대체 무엇이 있었길래 내가 그리도 괴로워 했던 건지 고민했다. 이 전에 있던 일들을 정리했다. 나에게 영향을 주었던 사람들에 대한 감정을 정리했다. 그리고 그림을 그렸다. 당시의 그림은 선생님이 가져가셔서 지금 나에겐 없다. 나를 괴롭혔던, 괴롭게 했던 이들이 고통받는 그림을 그렸다. 이게 내 진심이었다. 난 괜찮지 않았다. 그들이 세상에 없다는 느낌이 이 병원을 행복한 장소로 만든 것이다.
병동에서 그린 그림과 같은 그림은 아니지만 정신과를 다니기 전부터 그렸던 그림들이다. 이 글에서 모두 어떤 의미인지 하나하나 설명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나는 병동에서는 이런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런데 왜 내 감정을 직시한 이후에 또 같은 것을 반복했을까? 이를 해결해야만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다음 날이 되었다. 전화 시간을 기다렸다. 티머니를 들고 공중전화에서 어머니의 번호를 눌렀다. 심장이 죽을 것 마냥 뛰었다. 어머니가 전화를 받았다.
왜 그랬어?
내 첫 마디였다.
그렇게 사촌언니의 번호도 알음알음 물어 언니와도 통화를 했다. 아버지와도 통화를 했다. 그 이후는 잘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내 인생을 스쳐간 모든 이들과 통화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른이라 생각한 사람들과, 나를 보호해야 마땅한 사람들과만 통화를 했을 뿐이다. 마음이 거대한 실타래라면 이제서야 끝을 찾은 것 같았다. 꼬인 이어폰을 풀어도 풀어도 더 엉키기만 했는데, 이 거대한 실타래의 고작 끝 부분을 찾았다고 이것을 풀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이 감정과 '불행중독'이라는 책을 연관지어 병동에서 나가야 하는 이유를 논리정연하게 선생님들께 브리핑했다(?). 과장님께선 잘 받아들여주셨고 앞으로 외래 치료를 하기로 하며 퇴원날짜를 정했다. 나는 이 모든 과정을 내 스스로 찾고 깨달았기에 외래에서의 상담은 프로이트의 자유 연상 기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의사 파업이 계속 진행될 거라고는 생각 못했을 때이다.)
그렇게 나는 4월 20일에 자취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 이전에, 어머니와의 불화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