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튼
나는 어릴 적부터 이것 저것 다 잘해왔다. 단 하나, 노력 빼고. 그저 그런 삶을 살아도 그럭저럭 평균의 삶에 만족하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고교 입학을 하고 나니 공부를 해야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갑자기 좋은 대학에 가고 싶어졌다. 당시 다니던 학원의 원장님께선 경희대 법대 출신이셨고, 난 그 분을 존경해서 같은 학교의 학잠을 입고 선배님!이라고 불러보고 싶었다. 얼마나 낭만적인가-
그래서 나는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학급 회장, 각종 대회와 공모전; 성적, 독서… 몇 년을 노력해서 얻어냈다. 단 하나, 봉사 빼고. 난 봉사가 필수인 것을 몰랐다. 난 봉사 시간이 한 시간 모자란 바람에 원서를 넣을 수 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이것을 알리가 없던 나와 주변 선생님들은 이런 저런 학교들을 추천해주셨고 나는 마냥 신나게 자기소개서를 써내려갔다.
결과는 당연히 모두 탈락했다. 단 하나, 서울여대 빼고. 서울여대 식으로는 내신 점수가 상당히 높았다. 그래서인지 봉사를 감안 해서 추합으로 붙을 수 있었다. 만족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분하고 화가 났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EBS 수업만 들으며 가성비 공부를 해왔다. 내 사정을 알아주는 학원 선생님 밑에서 정말 좋은 기회 속에서 노력했다. 어느 과외도 없이 상을 쓸었다. 순수한 나의 재능과 노력이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즉, 내 재능은 재능이 아니었고 노력은 노력이 아니게 되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때부터 나의 오랜 정신질환이 극적으로 심해지기 시작했다.
언젠가 서술할 테지만, 조기정신증들이라 불리는 것들을 겪으면서 단 하나만을 꿈꿨다. 자유롭고 낭만적인 것을 쫓고 싶다는 꿈을.
그래서 찾게 된 대안은 교환학생이었다. 토플 점수 80이상만 받으면 괜찮은 학교들에 다닐 수가 있었다. 문제는 학비였다. 본교 납부가 아닌 학교들이 괜찮은 학교들이었고 기숙사에 100% 붙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어머니와 아버지는 금전적으로 반대를 하셨다. 그리고 또 하나.. 1년 뒤면 이 지옥으로 다시 돌아와야 했다. 이 지옥 또한 다른 글에서 후술할 것이다.
결국 난 또 포기했다.
첫 번째는 재수
두 번째는 교환학생
그렇게 휴학을 하고 알바만 하는 삶을 살았다. 학원 보조교사, 과외, 베이비 시터, 음식점.. 다양한 알바를 했다. 그러면서 내가 느낀 것이 있다.
나.. 즐거운 걸 찾았어
난 무언가 만들고, 가르칠 때 엄청난 힐링을 받는다. 타인과 소통하고 함께 무언가를 공유한다는 것이 나에겐 굉장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교육, 예술, 언어에 대단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민간이지만 미술심리상담자격증과 종이접기지도사1급을 땄다. 이를 활용하여 아이들에게 치유가 되는 시간을 선물하였다.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들며 세상과 소통했다. 언어를 배우며 나의 세상을 넓혀갔다. 처음엔 이를 주변 사람에게만 알렸다. 하나, 둘.. 너 재능있다는 소리를 다시 듣기 시작했다.
재미도 있고 재능도 있는데 노력까지 한다면?
나는 더 큰 물에 가야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