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3학년 1학기 국어 교과서에는 '행복한 짹짹콩콩이'라는 듣기 자료가 나온다. 학교에서 놀이를 하던 아이들이 어느 이유로 부상을 입은 참새를 발견하여 교실에 데려온 후, 이름을 '짹짹콩콩이'라고 지어주고 돌봐주는 짧은 이야기이다. (이름이 짹짹콩콩이인 이유는 짹짹하고 울고, 콩콩하고 뛰어다녀서이다.) 그날 저녁, 아이들이 짹짹콩콩이가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어 각자 학교에 돌아와서 봤더니 담임 선생님과 친구들이 모두 와 있었다는 다소 동화같기도 한 이야기이다.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매 년 새로 만나는 3학년 아이들은 하나 같이 이 짹짹콩콩이 이야기를 너무 좋아하여, 한 번만 더 들려달라고 내게 간청을 하곤 한다. 아마도 이 이야기에는 아이들의 심금을 울리는(?) 어떤 포인트가 있는 모양인데, 이야기를 들으며 아이들이 짓는 흐뭇한 표정이 너무도 귀여워서 나는 못 이기는 척하며 이야기를 여러 번 더 들려주곤 한다.
짹짹콩콩이가 있었어요!
교육과정 계획 상 짹짹콩콩이 이야기가 나오는 단원은 1학기 말 즈음, 그러니 여름 즈음에 공부를 하게 된다. 그 해 여름에도 나는 3학년을 맡아 아이들과 짹짹콩콩이 이야기를 들었다. 역시 아이들은 이 짹짹콩콩이 이야기를 특히 좋아하며 즐거워했다. 짹짹콩콩이 이야기를 배우고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아침부터 비가 많이 쏟아지는 장마 기간이었는데, 여자 아이 두 명이 손을 잡고 상기된 얼굴로 등교를 했다. 그리고는, 실내화 가방을 신발장에 넣지 않고 내게 가져와서 하는 말이 '짹짹콩콩이가 있었어요!'였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이해가 바로 되지 않았지만 잔뜩 흥분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등굣길에 공원을 지나는데, 쏟아지는 비를 피하려던 참새 한 마리가 거센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아이들의 눈앞에서 철제 구조물에 세게 부딪혔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기절을 했는지, 아니면 죽었는지 바닥에 떨어졌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발을 미세하게 떨고 있었기에 그대로 실내화 가방에 넣어 데려온 것이란다. 참새가 죽은 것 같지는 않으니 교과서에 나왔던 '짹짹콩콩이' 이야기처럼, 우리도 교실에서 참새를 돌봐주면 좋겠다며 아이들이 기쁜 얼굴로 말했다. 덩달아 다른 아이들까지 난리가 나서 이름을 그대로 '짹짹콩콩이'로 해야 할지 아닌지 토론을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교탁 위에 놓인 실내화 가방을 보며 고민을 시작했다. 만약 실내화 가방을 열었을 때 참새가 죽어 있으면 어떡하나, 하는 고민에서부터 교실에서 정말 참새를 키우게 되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나, 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고민까지. 참새를 구조하며 학교에서 들었던 '짹짹콩콩이' 이야기를 떠올린 아이들의 순수함을 지켜주고 싶기에 나의 복잡한 속마음을 내색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떠올린 방법이 우선은 교실을 나오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아이들을 진정시키고는, 실내화 가방을 들고 교실을 나오며 말했다.
"얘들아, 참새가 많이 놀랐을 거니 선생님이 조용한 곳에서 살짝 상태를 볼게. 만약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라면 다른 선생님들과 잘 협의를 해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방법을 찾아볼 테니, 차분하게 책 읽으며 기다려."
그러니 아이들은 알겠다면서도 또 이런저런 방법을 내게 알려준다. '선생님, 만약에 참새가 다쳤으면 보건실에 가면 돼요!' 같은 세심한 조언은 물론 '참새가 놀랄 수도 있으니까 손수건 같은 걸로 눈을 가려주면 좋을 것 같아요!', '교실에서 키워야 하니까 절대로 놓치면 안 돼요!'라는 신신당부까지. 교실을 나오며 내 어깨가 어찌나 무거웠는지 모른다.
너희들은 모를 진실
지금부터 서술할 내용은, 아이들은 아마 평생 알 수 없을 진실이다. 실내화 가방을 들고 교실을 나오며 나는 심각했다. 죽은 참새를 볼 자신도, 살아 있는 참새를 볼 자신도 사실 내겐 없었다. (이런 선생님이라 미안해.) 그러다 머릿속에 퍼뜩 떠오른 인물이 있었으니, 교무부장님이었다! (부장님, 갑자기 죄송합니다.) 어느 시골 섬마을에서 자란 교무부장님, 평소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게 무엇이든 뚝딱 해결하는 능력이 있는 교무부장님이라면 왠지 이 상황도 쉽게 풀어주실 것 같았다. 그리하여 나는 무작정 교무실로 향했다.
하지만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교무실에 교무부장님은 계시지 않았고 하필 교감 선생님도 계시지 않았다. 나는 교무실 문 앞에서 실내화 가방을 들고 안절부절, 수상하게 굴다가 지나가던 체육 전담 선생님을 포착했다. 나와 비슷한 또래에 남자! 체육 선생님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교무실에 함께 들어왔다. 교무실에 근무하시던 실무사님까지 셋이서 실내화 가방을 앞에 두고 짧은 토의를 했다. 참새가 죽어 있으면 어쩌지, 만약 살아 있어도 어쩌지. 답이 없는 토의였다.
그러다 체육 선생님이 먼저 실내화 가방을 열어 보자고 했다. 실내화 가방 안에서 어떤 기척도 보이지 않았기에 별생각 없이 실내화 가방을 열었다. 그리고 벌어진 일. 마술사 모자에서 비둘기가 튀어나오듯 참새가 날아올랐다! (짜잔!) 참새가 죽지 않은 건 다행이었지만, 그 사실에 기뻐할 틈이 없었다. 튀어 오른 참새 때문에 모두 어찌나 놀랐는지. 참새는 저 나름대로 놀라서 푸드덕덕 재빨리 날아다니고, 그런 참새 때문에 우리는 더 혼비백산하고. 조용했던 교무실이 말 그대로 한바탕 난리가 났다. 참새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잠시 기절을 했다 눈을 떴더니 어딘지 모를 밀폐된 공간 안이었으니 놀랄 만도 했을 것이다. 더욱이 문이 열려 나와 보니, 저를 보고 놀라서 큰 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여러 명. 참새가 놀라다 못해 다시 기절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하지만 그땐 참새의 입장을 헤아릴 겨를이 없었다. 놀란 참새는 어찌나 빠르던지, 그토록 빠른 속도로 날아다니는 참새를 나는 두 번 다시 본 일이 없다. 어디에 앉거나 좀 진정이 되어야 참새를 밖으로 내보낼 궁리를 할 건데, 패닉에 빠진 참새는 그저 빠른 속도로 미친 듯이 날아다니기만 했다. 우리는 각자 책상 밑에 숨어 미친 듯한 속도로 날아다니는 참새를 피하다가 우선은 교무실의 창문을 모두 열어 보기로 했다. 우리가 포복 자세로 조심조심 창문을 열자 참새도 조금은 진정이 되었는지 서랍장 뒤에 내려앉았다. 참새를 어서 창문이 있는 방향으로 유도해야 했다. 섣부르게 움직였다가는 참새가 다시 흥분해서 날아다닐 건데 어쩌나.
그때 실무사님께서 아이디어를 내셨다. 실무사님이 자신의 책상 뒤 쪽에 있던 우산을 펼치고, 우산 안쪽의 공간으로 참새를 유도하여 무사히 창 밖으로 내보냈다! 우리는 얼른 창문을 닫고, 참새의 동향을 살폈다. 다행히 참새는 별문제 없이 밖으로 나가 우리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이 뜻밖의 참새 소동은길어야 10분 남짓이었는데, 마치 한 시간은 더 지난 것처럼 느껴졌다.놀란 마음을 진정하고 보니 등에 땀이 주룩 흐르고 있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내가 왜 교무실로 가겠다고 생각했을까, 후회도 되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이 소동을 말할 순 없었다.
너희들 앞에서 난 강해져
교실에 올라오니 아이들이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등교를 하지 못해 상황을 몰랐던 아이들도 친구들에게 상황을 전해 듣고, 짹짹콩콩이는 어디 갔냐며 물었다. 이에 나는 아이들에게 참새는 다행히 잠시 기절을 했던 거고, 상태를 보려고 실내화 가방을 열으니 그림같이 날아가 버렸다는 말로 상황을 마무리했다. 그 사이에 벌어졌던 많은 상황을 생략하긴 했으나 거짓말은 아니었다. 아이들은 짹짹콩콩이를 키우지 못하게 되었다며 아쉬워했지만, 참새가 죽은 게 아니란 사실에 기뻐했다. 참새를 직접 구조해 왔던 두 여학생은 자신들이 생명을 살렸다며 뿌듯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곧 수업 시작을 알리는 9시 종이 쳤고 나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수업을 진행했지만, 왠지 모르게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다.
아이들을 하교시킨 후 나는 체육 선생님과 교무실 실무사님께 아침에 그런 소동을 일으켜(?) 죄송하고, 감사했다는 마음을 전했다. 교과서에 '짹짹콩콩이' 이야기가 나온다는 사실을 몰랐던 두 분은 나의 설명을 들은 후, 아이들의 마음씨가 착하고 귀엽다며 웃었다. 정신을 조금 차리고 생각해 보니 그렇긴 했다. 어린이들의 그 순수함과 천진함이란. 어린이들의 그런 특징은 성장의 과정 속에서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사라져 버리기에 더욱 찬란한지도 모른다.
내가 좋아하는 '소녀시대의 데뷔곡' '다시 만난 세계'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널 생각만 해도 난 강해져. 울지 않게 나를 도와줘~' 이 노래를 나의 상황에 맞게 개사한다면 이렇게 고칠 것이다. '너희들 앞에서 난 강해져. 사실은 그렇지 않지만~' (정글샘이 부릅니다. 선생님의 세계!)
생각해 보면'짹짹콩콩이 사건'처럼 어린이들에게 차마 내색할 수 없는 고민스러운 상황에 빠진 적이 많다. 고백한다. 교실에서 배추흰나비 애벌레를 키울 때, 화분 밖으로 탈출해 버린 애벌레를 다시 화분에 올려줘야 하는데 너무 커버린 애벌레가 온몸을 비틀며 나의 구조를 거부하는 모습이 너무 답답하기도, 징그럽기도 해서 아이들 없는 교실에서 혼자 운 적이 있다. 그뿐일까. 날개를 잘 말리지 못해 평생 날지 못하게 생긴 나비를 화단에 묻어주었을 때도, 아이들을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나비가 잘 나아서 날아갔다고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교실에 바퀴벌레가 등장해 아이들을 놀라게 했을 때도, 무서운 거 아니라며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누구보다 무서웠다.
그래도 다행인 점. 아이들 앞에서는 인간적인 자아보단 교사로서의 자아가 더 힘이 세다.그렇기에 아무리 난처한 상황이 생겨도 나는 늘 태연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용기를 낼 수 있다. 아이들은 알까? 내 진짜 마음을. 아이들이 내 마음을 몰라줘도 괜찮다. 아니, 절대로 몰랐으면 좋겠다. 우리 반 아이들이 그저 어린이답게 자신들의 천진함과 순수함을 마음껏 뽐내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는 아이들에게 동화보다 더 동화 같은 현실을 선물하기 위해 언제건 다시 용기 낼 수 있을 것이다. 매 해 여름이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문제의 '짹짹콩콩이 사건'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때론 웃으며, 또 때론 후회하거나 반성을 하면서도 평생 그 사건을 잊지는 못하리라. 어쩌면 그마저도 순수하고 천진한 아이들이 내게 준 선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