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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딱따구리 Jul 18. 2024

산후•육아우울증 극복기-3.100점 임산부의 실체

처음으로 100점 맞아본 나? 쌍둥이 임신기(중)


살다 별로 특별하게 무언가를 잘한 적은 딱히 없었던 듯하다.


초등학교 때부터 글쓰기는 꽤 잘해서 그걸로 입상해서 주목을 받긴 했지만 뭐 그것도 그저 그랬던 것 같고, 중학교 때는 아이돌에 빠져서 공부를 하지 않았으며, 고등학교 때도 또 다른 아이돌에 빠진 동시에 온갖 책이나 음악 따위를 탐닉하는 바람에 또 성과가 나는 무언가는 하지 않았다. 그래왔던 내가 그래도 공부를 하는 사람의 범주에 드는(?) 교사를 하고 있는 것도 참 신기할 노릇이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돼! 공부는 무조건 열심히 해야 돼! 같은 말은 양심상 하지 못하는 교사가 되는 형벌을 받게 되었다.)


어쨌거나 그런 나에게,


- 100점!
- 와 이건 100점이에요!
- 이거, 100점인데?


같은 말들을 연속으로 듣는다는 것은 뭔가 좀 낯선, 말하자면 자잘하게 계속해서 5등 로또에 연속해서 당첨되는 것 같은 느낌의 낯설음이었달까. 아니 뜬금없이 웬 100점 타령이냐 하면, 뜬금없게도 임신 기간에 나는 이 말을 정말로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비교적 노산인 데다가 (쌍둥이 임신은 만 30세만 넘어도 위험군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 당시 실로 충격적이었다. 고로 나는 고위험군 임산부였다!), 엄마가 걱정과 번민으로 가득한 인간이라는 것 을 알기라도 하듯이, 뱃속의 아가들은 말 그대로 FM-정석대로 쑥쑥 잘 커주었다. 1-2주에 한번 서초 모 산부인과에 가서 검진을 받을 때마다, 나의 두 운명들은 정말 아주 미세한 차이로 엎치락 뒤치락을 반복하면서 너무나 비슷한 크기로 경쟁하듯 잘 커 주었다. 친절하고 다정했던 의사 선생님께서는 진료 때마다 늘 '100점'이라고 해주셨다. 자기가 본 쌍둥이 중에 제일 이쁘고 나란히 잘 커준다고.



100점!

학교에서도 거의 받아보지 못했던 점수. 우리 기특한 운명들 덕분에 나는 거의 늘 100점 산모가 되었다. 언제나 100점. 무슨 검사를 하든, 언제 어떤 초음파를 보든, 다 정상 범위 혹은 상위에 속하며 아가들은 힘을 내주고 있었다. 나는 늘 대충대충 중간정도의 삶을 살아온 것 같은데, 우리 신박한 아가들은 달랐던 것이다. 약간의 불안한 마음을 지니고 병원 문을 들어서다가도, 나올 때면 늘 까맣고 하얀 초음파 사진을 행복하게 쥐고 나오도록 만들어준 기특한 두 녀석들. 덕분에 나는 한 것 도 없는 주제에, 모범 적인 인간이 된 듯한 으쓱한 감정마저 들었다.



우리 쌍둥이 아가들은 나의 배에서 왼쪽 아래, 그리고 오른쪽 위쯤에 각각 자리 잡았었는데 지금 첫째가 왼쪽 아래 아기, 둘째가 오른쪽 위 아기이다.  의사 선생님을 통해 착상이 아마 첫째 아기가 더 빨랐을 것이라 추정되며, 그게 아니더라도 아기가 나오는 곳에서 가까운 곳의 아기가 첫 째가 될 확률이 높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여기 왼쪽에 있는 애가 첫 째, 여기 오른쪽 조금 위에 있을 아기가 둘째, 하면서 양손으로 기특이들을 동시에 토닥토닥 하곤 했다.



어느 날, 임신 초기가 꽤 지나고 15~16주쯤 정도에 나는 드디어 첫 태동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근데 사실 둘 중 누구인지는 모르겠다. 평소에 몸의 변화나 느낌에 꽤 예민한 편이다. 하지만 순간 배에서 나는 뭔가 바람이 꼬르륵 말려 들어가는 듯한 소리와 마주한 순간 혹시? 싶었다가, 그냥 장에서 나는 소리가 아닌가 했다. 그러나 직감적으로 평소의 그런 것들과는 또 확연히 다른 것 같다 느껴져 바로 육아 카페 글들을 몇 개 검색해 보니 나의 그 느낌은 많은 산모들의 첫 태동의 묘사와 아주 흡사했다. 으앗, 태동이라니! 너무나 귀엽고 기특하고 아쉬웠다.제발 다시 한번만 더 움직여 주면 그 느낌을 온전히, 그리고 영원히 저장해서 나의 인생 속 중요 페이지 한 곳에 크게 박제하고 싶었다. 그래서 1달째 아무것도 먹지 않고 수행 중인 요기처럼 가만히 멈추어 있으면 한 번이라도 더 아기들의 꼼지락 거림을 느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에 물도 마시지 않고 수십 분을 부동자세를 유지한 채 기다려 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며칠이 지나자, 그 꼬물감은 점점 잦아졌다. 지금도 그때의 그 사랑스러운 움직임이 너무 그립다. 초중기 때의 태동은 표현하자면 꼬르륵, 하고 뱃속에서 아주 작은 물고기가 한정적인 공간에서 팔랑 꿈틀대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임신이란, 계속 배를 쓰다듬게 되는 시간들.

기특하고 소중하고 한없이 사랑스러워서 아직 눈앞의 실체로 보이지도 않는데 나의 모든 것을 주고 싶은, 아니 이미 모든 것이 되어버린 존재를 기다리는 것. 그러한 시간들이다. 나의 몸에서 나의 심장이 아닌 두 개의 또 다른 심장이 뛰고 있다는 것은 정말 경이로운 일 그 자체였다. 나에게 온전히 생의 존재를 맡긴 연약한 사랑스러움의 극치. 내 몸에 남아있는 모든 양질의 영양분이 있다면 아가들에게 모두, 듬뿍 주고 싶었다.



중기가 되니 확연히 입덧이 줄게 되었다. 입덧이 줄어드니 정말로 살만 했다. 임신초기에는 보통 오전에 입덧이 정말 심했는데 그 롤러코스터 같던 오전에서 정오정도까지의 시간들이 거의 다 사라지고 나니, 비로소 할 수 있는 일들과 즐길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났다. 바로 집 앞 공원에 가서 아기들에게 좋다는 키위 주스나 직접 만든 샌드위치 같은 것들을 싸가서 여유롭게 먹는다던가, 아가들에게 좋은 클래식을 듣는다던가 하는 것들 말이다.



보통 임산부들에게 임신 중기는 황금기라고들 한다. 그러나 나는 둘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몸은 조금 더 무겁고 힘들었지만, 산전 휴직을 일찍 들어간 덕분에 그래도 비교적 편안한 나날들이었다. 그동안 보고 싶었던 밀린 책들도 보고, 육아용품들도 미리 준비하고, 아가들의 배넷 저고리나 손수건 따위를 세탁하고 개면서 그 시간들을 행복하고 여유롭게 보냈다. 또한 일찍부터 일을 나가는 남편에게 거의 매일 지령처럼 먹고 싶은 음식을 제시하면, 신박하게도 남편은 늘 퇴근길에 그것을 어떻게든 사 왔다. 그러면 부른 배를 잡고 아가들, 그리고 남편과 함께 저녁을 먹는 시간을 보냈다. 임신기간의 먹는 즐거움이란 정말 컸다. 그러고 나서 남편이 일찍 잠들면 홀로 또다시 책을 읽거나 하면서 참 여유롭고 충족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이때쯤 대학병원으로 진료를 옮기게 되었는데, 다행히 그 병원에서 만난 교수님은 정말 너무나도 좋은 분이셨다. 뭐 조금의 자잘한 이슈들은 있었지만 이 분 또한 이렇게 건강하고 비슷한 크기로 크는 아기들은 드물다며 또 100점이라고 하셨다. 어깨가 으쓱했다. ‘산모님이 정말 관리를 잘하시나 봐요.' 하실 때마다 양심에 찔리긴 했다. 하지만 어쨌거나 나도 아가들을 위해 좋은 것들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었고 그것의 몇 배에 부응하려는 듯 아가들은 정말이지 잘 커주었다. 그때쯤 갔던 강원도 태교여행도 참 즐거웠고, 다행히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임신한 나에게 친절했고 나는 그들에게 따뜻한 배려를 느꼈다.



지금 이 글을 쓰며 임신했던 기간의 시간들을 되살려보면, 사실 정말 행복했던 기억 외에는 모두 0으로 수렴했다고 할 정도로 좋은 기억 밖에는 없다.  지금 출산, 육아 우울증에 관한 에세이를 연재하면서도 임신 때의 기억은 정말이지 내가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던 듯하다. 그리고 대체 왜 그랬을까, 하고 생각해 보는 시간을 자연히 가지게 되었는데 비로소 그것이 의외로 남편의 배려와 도움 덕분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에는 그저 아이들이 별 탈 없이 잘 커주고, 또 내 몸이 원래 잔병치례가 많은 것 치고는 너무 건강하게 버텨주었기에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아침 일찍 일을 나가야 했으며 꽤 고강도의 일을 해야 했던 그때의 남편. 한여름에 일을 마치고는 그것은 배려하지 않은 다소 이기적인 아내의 온갖 음식 지령과 심부름을 묵묵히 수행하고 돌아와 준 남편의 그 사랑과 보살핌이 없었다면, 그때의 그 행복한 페이지는 아마도 결코 존재하지 못했을 것 같다. 산모들은 보통 임신 기간에 남편이 서운하게 했던 일들이 평생 간다고들 하고, 하나쯤은 있다고 하는데 나는 그런 기억이 단 하나도 없다.

그렇다. 100점 산모가 아니라, 100점 아기 그리고 100점 남편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100점 산모 행세를 할 수 있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임신 말기가 된 나는 출산을 앞두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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