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이외의 다른 존재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을까. 그 다른 존재가 심지어 말이 통하지 않는 "동물"이라면?
경주마 델피니를 식구로 맞으며 세웠던 목표, 희망했던 바는 이 말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행복 자체를 제공해줄 수는 없다. 아마 행복이란게 박스에 담길 수 있는 무언가였다면 아주 조금씩이라도 담아서 최대한 자주 그걸 가져다줬을 거다.
대신 나는 불행의 요소를 최소화하기로 했다.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하고 편안할 수 있는 환경을 주고, 델피니가 해야만 하는 "일"과 그 이외의 "휴식"이 적절히 균형을 이루도록 하고,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동시에 속으로 조금은 바랐달까, '이 정도면 그래도 피니가 최고 수준까진 아니어도 얼추 살만하다고 느낄지도 몰라.' 물론 불행하지 않은게 곧 행복은 아니다. 그래도 어쩌겠어, 더이상은 내가 줄 수 없는걸.
곧 네 번째로 경주에 나설 피니의 어제자 새벽 훈련을 담당한 영국인 기수가 끝나고 이런 말을 했다.
"She's happy. She's more confident. She knows what to do.(델피니는 기분이 좋고, 자신감도 더 생겼고, 자기가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사실 난 이런 평이 나올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빠르다, 느리다, 둔하다, 민첩하다, 뻣뻣하다, 부드럽다 등 경주마의 컨디션이나 기량에 대해 주고받는 말들은 말 그대로 "운동능력"에 관한 것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피니는 그렇게 치면 아직 부족한 게 많고, 개선할 점도 많다. 그런데 그 와중에 애가 행복(happy)하단다.피니와 함께 달리는, 수십년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경주마를 타 본 기수가 그렇게 느낀단다. 물론 그 역시 확신할 수는 없겠다, 과연 타인이 나의 행복에 대해 얼마나 정확히 판단할 수 있겠냐고 한다면 답을 하긴 어렵다. 그래도 이게 어디냐 싶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는 정해져 있다. 그걸 발휘하느냐 하지 못 하느냐, 혹은 할 의지가 있냐 없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뿐. 피니도 피니의 선이 있을거다. 델피니라는 경주마의 능력에는 분명 선이 있다. 그 선에 초점을 맞추면 "한계"가 되고, 그 선에 도달하기까지의 빈 공간에 초점을 맞추면 "잠재력"이 된다.피니의 한계가, 혹은 잠재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히 있고, 아마 어느 순간 우리 모두가 그걸 눈치채게 될거다. 그 사실을 바꿀 수는 없다. 단지 우린 피니가 끝에 도달하기까지의 여정을 "할 만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 뿐.
하루 세 번 밥 먹기
새벽마다 운동하기
오후부터는 쉬거나 졸기
한달에 한번씩 시합나가기
아프면 치료받기
일주일에 한번씩 아빠 얼굴 보고 간식 먹기
델피니의 삶을 단순화하면 진짜 저게 전부다. 그래도 저 별것도 아닌 부분 하나하나가 모두 빠짐없이 완벽하게 돌아가니 그 속에서 피니도 나름 만족하는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