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말이 생겼다며 같이 보러 가자는 남편의 말에 진지함이 느껴졌다. 말은 한번 각인된걸 무척 오래 기억한다는 말에 좋은 첫인상을 남기고 싶어서 일부러 승마장에서 쓰는 장갑도 끼고 갔다. 나한테서 말냄새가 나면 경계를 덜 하지 않을까.
관리사가 말에게 굴레를 씌워 마방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마체를 보여주기 위해 입혀놨던옷을 벗기니 괜히 추워 보인다. "옷 입혀도 되는데.." 중얼거려 본다.복도에 차분히 서있는 모습을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다가, 반신반의하며 혹시 한번 만져봐도 되는지 여쭈었더니 흔쾌히 괜찮다고 하신다. 천천히 한발자국을 떼며 오른손을 스윽 들어 올리는 순간, 말이 화들짝 놀라며 펄쩍 뛰어 피한다.
'아, 망했다.'
나도 말이 처음은 아니고 이 말 저 말 곧잘 쓰다듬어 주는데. 심지어 여기 오기 직전에도 생전 처음 보는 말들과 실컷 놀고 쓰다듬고 껴안다가 왔는데. 걔들은 아무렇지 않았는데, 오히려 나에게 다가오기도 했단 말이지. 그런데 이 상황은 뭔가. 애를 더 놀라게 할까 봐 당장에 그만둔다. 전보다도 더 멀리 떨어져서 뒤를 따라 마사 밖으로 나간다.햇살 아래 관리사를 따라 꼬맹이가 이리저리 걷는다.걸으면서도 곁눈질로 내쪽을 끝없이 살핀다.당시에는 "나를 노려봤어"라며 억울함을 토로했지만, 사실 적대적인 눈빛은 아니었다. 단지 불안과 긴장이 어렸던 것뿐. 괜히 애가 선해보이지 않는다는 심술궂은 생각을 한다. 유치해진다. "네가 나를 싫어하면 나도 너 싫어."아끼는 승용마들의 눈망울까지 들먹인다. "걔들이랑 달라 얘는." 단지 다른 게 아니라 나쁘단 소리다. 기가 찬다. 열살, 열두살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승용마들과 천지를 두 모르는 두 살 애기를 비교하다니.
성격이 어떠냐고 여쭈어본다.정말 착하다고 한다. 정말 착한데 겁이 정말 많다고, 신뢰를 쌓으면 기꺼이 잘 따라준단다. 그럼 그게 적대적인게 아니라 단지 겁이 나서 그랬던 건가, 하면서도 찜찜한 마음이 남는다.
다소 멋쩍게 관람이 끝났다. 나는 이미 첫 만남을 망쳤고 더 볼 것도 없다. 걸음이니 마체니, 봐도 모른다. 12시가 다 되어간다. 건초수레가 들어오는 걸 봤다. 애들 점심 먹을 시간이다.감사하다고, 들여주시라고 말씀을 드려서 꼬맹이가 마방으로 들어갔다.
심란한걸로 따지면 최고다. 나를 피해 펄쩍 뛴 순간 느낀 절망감은 그 애 눈빛을 보면서 점점 더 깊어졌다.남편이 이 말을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건 이미 알고 왔다. 나도 같이 와서 봐줬으면 좋겠고, 나도 함께 마음에 들어 하는 아이로 하고 싶다는 말이 거짓이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실은 "Please say yes."의 심정이었다는 걸 내가 모를 리가.
이 일을 어쩐다.마방에는 창문도 없다. 하긴, 창문이 있었대도 열 엄두도 못냈을거다. 손만 들어 올려도 기함을 하는데 무서운 괴물이 창문까지 열면 자기 방에 침입하려는 줄 알고 아주 난리가 날게 아닌가.남편이 잠시 다른 곳에 간 사이 마방 앞에서 얼쩡거려 본다. '어떡하지, 어떻게 만회를 하지, ' 떠나기 전에 관계를 조금이라도 회복하고 싶은 마음에 고민하다가 마방 앞에 가만히 다가가 섰다.어둑어둑한 마방 안에서 말이 서성이다가 다가와 창살에 코를 내민다.가만히 손을 대준다. 킁킁, 냄새맡는 소리. 수염이 스치고 따땃하고 축축한 숨이 닿는다.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따라와서 또 킁킁.
"아까는 미안했어, 근데 나 나쁜사람 아니야. 내 냄새를 기억해놔. 다음에 다시 만나면 그때는 오늘보다 조금 더 친하게 지내자."
말해주고 돌아 나왔다.
경주마는 승용마와 다르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다.'누가 같대?'라고 속으로 눈썹을 치켜세운다.내가 이 말을 타겠다는 것도 아니고 물고 빨고 같이 춤을 추겠다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자꾸 내게 "경주마란 이런 것이다" 혹은 "경주마란 이런 것이 아니다"라며 한마디씩 얹는다.삐딱하게 볼 필요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다.동의하는 내용도 있고, 안하는 내용도 있다.내가 너무 상처를 받을까 봐 우려가 되어 그런 말을 하는 경우도 있다.
단지내가 뭘 해야 하는지 생각해 봤다.우리 말이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지키는 것, 이게 내 몫이다.왜 우리 말은 건초 한 단 주고 남의 말은 두 단 주냐는 류의 부당함은 아니다. 경주마도, 경주마이기 이전에 말이다. 동물이고 생명이고 감정이 있고 고통을 느낀다. 말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과 모든 이익이 뒤엉켜서 자꾸만 말의 복리가 희생되는 것, 그게 내가 생각하는 '부당함'이다. 그 상황만큼은 막으려고 한다. 모든 말에게는 각자의 삶이 있다. 그러나 그 순리를 포기와 처분의 빌미로 사용하지는 않을거다.
건강했으면 좋겠다. 등에 무거운 사람을 싣고도 대견하게 잘 뛰어준다면 난 더이상 바람은 없다.키워주신 분께 듣자 하니 성질이 좀 있단다. 애당초 엄마도 한성깔 하고 아빠도 한성깔 한단다.착한데 겁이 많다는 말은 아무래도 좀 미화된 건가 싶다. 하긴 나라도 잠재적인 구매자에게 조금은 분칠을 해서 말을 할 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