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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마남녀 Jun 25. 2024

마주수업(馬主授業)

馬主授業: 경주마 델피니



자라면서 이런 말을 많이 들었다, "너같이 복 받은 애가 어딨니. 온 집안 식구들이 다 너한테 맞춰주고 해 달란 거 다 해주고. 너는 그저 공부만 하면 되는데. 다른 집 애들이 다 너처럼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는 줄 알아?"

생각해 본다.

분명 맞다, 확실히 나는 그놈의 "공부"를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슨 벼슬이라도 하듯 집안 분위기를 좌지우지했다. 내 공부에 있어서는 집이라는 작은 우주가 나를 중심으로 도는 식이었다. 아, 물론 잘하기도 했다. 입시란 입시, 시험이란 시험은 다 붙으며 양질의 성과를 딱딱 내놓았던 아이. 그렇게 쌓아 올린 공부의 결과물을 손에 쥔 순간 미련도 없이 한 번에 갖다 버려서 그렇지, 나도 내 몫은 했다. 애당초 그 공부로 돈까지 벌어오라고 한 것은 아니었으므로(분명 돈을 벌라는 말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이 정도면 공정거래였다고 보는 바다.




​며칠 전 장수를 찾았다. 여섯  째다. 편도 250킬로미터 거리를 큰 개까지 싣고 오간 게 벌써 여섯 번이나 됐다. 줄곧 쉬기만 하던 델피니가 드디어 훈련이라는 것을 시작한다는 이야기를 지난주 전해 들은 터다. 안다, 훈련이래 봐야 별 게 없다. 그저 걸을 거다. 기껏해야 속보나 조금 할까. 경주마라고 하면 으레 떠올리는 힘찬 구보니 습보니, 웃음이 난다. 못  거다. 그래도 기승이라고, 평보든 속보든 사람 싣고 움직인다니 금세 또 걱정이다. 우리 생각에는 항상 별 것도 아닌 훈련이었지만 피니는 버거워한 한두 번 아니었다. "그까짓 거에?" 소리 나올 만한 가벼운 훈련에도 다리를 절었던 아이다. 그렇기에 잠깐 인사차 나온 관리사분에게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묻는다, "피니 아픈 데 없죠?"


문제는 대답이다.


​"아 뭐 워낙 하는 게 없어서.. 아플 일이 없어요. 그냥 조마삭 좀 돌리는 게 다라서."


​아하하하 그렇구나, 웃는다. 바보 같은 질문이었음을, 괜한 걱정이었음을 인정한다는 표현 정도 된다. 노파심에 말하지만 관리사분의 대답에 아무 문제도 없다. 그렇지만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마당이니 솔직하게 말할까, 그 말을 들은 순간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주인" 입장에서 말이다.


​하는 일 없는 말. 훈련도 안 하고 쉬는 말. 그 말이 우리말이다. 델피니. 

문득 가족들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다른 건 다 우리가 알아서 해.  주인이, 그리고 내가. 심지어 가족 이외에도 많은 분들이 널 응원해. 잘 달려주길 기원하고 건강하고 멋진 모습 보이길 희망하고 있어. 심지어 있지, 우리가 너더러 잘 달리라는 것도 아니야. 내가 마음에 손 얹고 맹세할게, 나 단 한 번도 너보고 1등 해라, 5등 안에 들어라, 밥 값 벌어와라? 그런 기대는 애당초 한 적도 없어. 앞으로도 안 해. 그런 건 원래 내 관심사도 아니다. 그저 달리길, 다치지 말고 안전하게 출발해서 무사히 결승선 들어오길, 매번 가 제일 마지막이라 해도, 다른 아이들이 모두 다 사라진 후 그제야 너만 뒤늦게 들어온다 해도 나는 아무런 상관도 없거든. 그저 대견할 뿐이야. 넌 그냥 달리기만 하면 돼. 그런데 그게 그렇게 어렵니?"


​확실한 것 하나는 그게 피니에게 어렵다. 유일하게 바라는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많이 바라는 게 아닌 것 같은데 그걸 해주지 못한다. 마음이 급한 건 아니다. 시간은 많이 걸려도 괜찮다. 그러나 불안하지 않다고 하면 그건 거짓이다. 영영 안 되면 어떡하지, 끝까지 못 달리면 어떡하지, 두 살 갓 넘은 꼬맹이를 두고 벌써 미래를 걱정한다. 애당초 내 기대가 크지 않았으니까 최소한 그 정도는 "당연히" 충족해 줄 거라고 믿었던 걸까, 당당하게?


​내가 뭘 잘못했나 자꾸 되짚어 보기도 한다. 왜냐,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게 없기 때문이다. 물론 예산의 상한이야 있었다. 그래도 우리가 쓴 돈이 적은 금액이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물론 경주마란 게 비싸지려면 끝은 없다. 우리는 그 정도 돈은 안 썼다. 그래도 수 천이다, 그것도 수말에 비해 항상 낮은 가격에 거래되는 "암말"에. 그리고 누누이 강조하지만, 잘 뛰길 바란 것도 아닌데. 말하자면 우린 돈을 10을 쓰고 기대는 3만 한 거다, 보통 사람 심리라는 게 돈은 10만 써도 기대는 50을 하지 않나. 그런데 지금 상황은 3은커녕, 0인 거다. 어쩌면 0보다 더 아래일 수도 있다.


이 말을 고른 것이 독단적인 결정이었나, 아니 전혀. 뭣도 모르고 눈 감고 찍었나, 아니 전혀. 최선을 다 한 고민과 예측과 더불어 전문가의 추천까지 받은 결과다. 심지어 그 추천을 한 사람들의 기대조차도 최소한 3보다는 컸을 거다. 그럼에도 우리는 3, 아니 2만 돼도 족하다고 생각했다. 욕심을 병적으로 경계해 왔다. 그런데 하다 못해 그 흔한 "Beginner's luck"조차 우리에겐 해당사항이 없는 건가. 기가 막히다.


델피니가 밉냐, 아니. 뻐 죽는다. 쁜 데다가 이젠 짠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더 미친다. 만감이 교차한다. 그마저도 막상 죽어라 운전하고 내려가서 "피니야-" 하고 불러 건초를 먹다 말고 고개 들어 쳐다보는 애 눈을 보는 순간 다 사라진다. "우리 피니 힘들다, 우리 피니 훈련 잘했니, 얼마나 힘들었니" 어리디 어린 어깨를 톡톡 다독이며 눈망울을 들여다보느라 바쁘다. 그러나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그래도 한 번은 '어떡하지, 만약에 피니가 계속 못 뛰면..'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경주마가 되기 위한 수업은 있다. 그러나 마주가 되기 위한 수업은 없다. 좀 상스럽게 말해서 돈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마주다. 문득 "마주수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경주마를 들이는 게 어떤 일인지,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고 그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책임감 있는 주인의 태도, 결정이란 무엇인지 배워야 한다. ​죽어라 애만 볶아댄다. 왜 안 뛰니 왜 못 뛰니. 그런데 어쩌면 진짜 수업이 필요한 건 우리 인간 아닐까. 정작 부족한 건 주인인데 말만 원망을 듣고 말만 괴롭다. 그게 피니일까.


​장수에서 올라오는 길에 오래된 단골집에 남편과 저녁을 먹으러 들어갔다.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맥주를 홀짝이며 피니 이야기를 하다가, 축 처져 있는 날 보며 남편이 이런다, "피니에게 믿음을 조금 더 줘 봐. 피니 그 정도 받을 자격은 있는 애야."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나는 대체 무슨 인간인가. 어리다며, 아직 너무 애기라며 말로는 그러면서도 늦었다고, 다 컸다고 속으로는 애를 벼랑으로 몰아가고 있었던 걸까. 시작도 하기 전에 끝을 걱정하는 지금의 태도는 합리적 준비인가 근거 없는 비관인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우리 말이 그 정도 믿음은 받을 자격 있으니까. 남들이 뭐라든 우리만은 믿어야 되는 거니까. 단지 나는, 피니가 "그렇고 그런" "수많은" 경주마 중 하나로 이름도 뭣도 없이 쓸려 내려가 잊혀지는 게 무섭다. 피니가 아무리 귀여워도, 아무리 빗질을 잘 참고 당근을 맛있게 먹어도 경주마는 그저 잘 달리는 게 최고니까. 주로에 나서지조차 못하는 말을 관심 갖고 좋아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하찮은 말, 가치도 없는 말 취급을 당할 게 너무 속이 상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나는 믿기로 했다. 더 견고하게. 더 열심히.

그리고 적응하기로 했다. "아무 일도 없는" 피니에게.

이번 주에도, 다음 주에도, 그다음 주 에도 아무런 특별한 것도 안 하고 이렇다 할 변화도 보이지 않는 휴양마 델피니를 나는 그래도 믿는다.



피니야, 괜찮다.






2020.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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