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면서 이런 말을 많이 들었다, "너같이 복 받은 애가 어딨니. 온 집안 식구들이 다 너한테 맞춰주고 해 달란 거 다 해주고. 너는 그저 공부만 하면 되는데. 다른 집 애들이 다 너처럼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는 줄 알아?"
생각해 본다.
분명 맞다, 확실히 나는 그놈의 "공부"를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슨 벼슬이라도 하듯 집안 분위기를 좌지우지했다. 내 공부에 있어서는 집이라는 작은 우주가 나를 중심으로 도는 식이었다. 아, 물론 잘하기도 했다. 입시란 입시, 시험이란 시험은 다 붙으며 양질의 성과를 딱딱 내놓았던 아이. 그렇게 쌓아 올린 공부의 결과물을 손에 쥔 순간 미련도 없이 한번에 갖다버려서 그렇지, 나도 내 몫은 했다. 애당초 그 공부로 돈까지 벌어오라고 한 것은 아니었으므로(분명 돈을 벌라는 말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이 정도면 공정거래였다고 보는 바다.
며칠 전 장수를 찾았다. 여섯번째다. 편도 250킬로미터 거리를 큰 개까지 싣고 오간 게 벌써 여섯번이나 됐다. 줄곧 쉬기만 하던 델피니가 드디어 훈련이라는 것을 시작한다는 이야기를 지난주 전해 들은 터다. 안다, 훈련이래 봐야 별게 없다. 그저 걸을거다. 기껏해야 속보나 조금 할까. 경주마라고 하면 으레 떠올리는 힘찬 구보니 습보니, 웃음이 난다. 못할거다. 그래도 기승이라고, 평보든 속보든 사람 싣고 움직인다니 금세 또 걱정이다. 우리 생각에는 항상 별것도 아닌 훈련이었지만 피니는 버거워한게 한두번 아니었다. "그까짓 거에?"소리 나올 만한 가벼운 훈련에도 다리를 절었던 아이다. 그렇기에 잠깐 인사차 나온 관리사분에게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스윽 묻는다, "델피니 아픈데 없죠?"
문제는 대답이다.
"아 뭐 워낙 하는게 없어서..아플 일이 없어요. 그냥 조마삭 좀 돌리는게 다라서."
아하하하 그렇구나, 웃는다.바보 같은 질문이었음을, 괜한 걱정이었음을 인정한다는 표현 정도 된다.노파심에 말하지만 관리사분의 대답에 아무 문제도 없다. 그렇지만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마당이니 솔직하게 말할까, 그 말을 들은 순간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주인" 입장에서 말이다.
하는 일 없는 말. 훈련도 안하고 쉬는 말.그 말이 우리말이다. 델피니.
문득 가족들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다른건 다 우리가 알아서 해. 네 주인이, 그리고 내가. 심지어 가족 이외에도 많은 분들이 널 응원해. 잘 달려주길 기원하고 건강하고 멋진 모습 보이길 희망하고 있어. 심지어 있지, 우리가 너더러 잘 달리라는 것도 아니야. 내가 마음에 손 얹고 맹세할게, 나 단 한 번도 너보고 1등 해라,5등 안에 들어라, 밥값 벌어와라? 그런 기대는 애당초 한 적도 없어. 앞으로도 안해. 그런건 원래 내 관심사도 아니다. 그저 달리길, 다치지 말고 안전하게 출발해서 무사히 결승선 들어오길, 매번 네가 제일 마지막이라 해도, 다른 아이들이 모두 다 사라진 후 그제야 너만 뒤늦게 들어온다 해도 나는 아무런 상관도 없거든. 그저 대견할 뿐이야. 넌 그냥 달리기만 하면 돼. 그런데 그게 그렇게 어렵니?"
확실한 것 하나는 그게 델피니에게 어렵다. 유일하게 바라는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많이 바라는 게 아닌 것 같은데 그걸 해주지 못한다.마음이 급한 건 아니다. 시간은 많이 걸려도 괜찮다. 그러나 불안하지 않다고 하면 그건 거짓이다. 영영 안 되면 어떡하지, 끝까지 못 달리면 어떡하지, 두 살 갓 넘은 꼬맹이를 두고 벌써 미래를 걱정한다. 애당초 내 기대가 크지 않았으니까 최소한 그정도는 "당연히" 충족해 줄거라고 믿었던걸까, 당당하게?
내가 뭘 잘못했나 자꾸 되짚어 보기도 한다. 왜냐,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게 없기 때문이다. 물론 예산의 상한이야 있었다. 그래도 우리가 쓴 돈이 적은 금액이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거다. 물론 경주마란게 비싸지려면 끝은 없다. 우리는 그정도 돈은 안썼다. 그래도 수천이다, 그것도 수말에 비해 항상 낮은 가격에 거래되는 "암말"에. 그리고 누누이 강조하지만, 잘 뛰길 바란 것도 아닌데. 말하자면 우린 돈을 10을 쓰고 기대는 3만 한 거다, 보통 사람 심리라는 게 돈은 10만 써도 기대는 50을 하지 않나. 그런데 지금 상황은 3은커녕, 0인거다. 어쩌면 0보다 더 아래일 수도 있다.
이 말을 고른 것이 독단적인 결정이었나, 아니 전혀. 뭣도 모르고 눈감고 찍었나, 아니전혀. 최선을 다한 고민과 예측과 더불어 전문가의 추천까지 받은 결과다. 심지어 그 추천을 한 사람들의 기대조차도 최소한 3보다는 컸을거다. 그럼에도 우리는 3, 아니 2만 돼도 족하다고 생각했다. 욕심을 병적으로 경계해왔다. 그런데 하다못해 그 흔한 "Beginner's luck"조차 우리에겐 해당사항이 없는건가.기가 막히다.
델피니가 밉냐, 아니. 예뻐 죽는다. 예쁜 데다가 이젠 짠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더 미친다.만감이 교차한다. 그마저도 막상 죽어라 운전하고 내려가서 "피니야-" 하고 불러 건초를 먹다 말고 고개 들어 쳐다보는 애 눈을 보는 순간 다 사라진다. "우리 피니 힘들다, 우리 피니 훈련 잘했니, 얼마나 힘들었니" 어리디 어린 어깨를 톡톡 다독이며 눈망울을 들여다보느라 바쁘다. 그러나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그래도 한번은 '어떡하지, 만약에 피니가 계속 못 뛰면..'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경주마가 되기 위한 수업은 있다. 그러나 마주가 되기 위한 수업은없다.좀 상스럽게 말해서 돈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마주다. 문득 "마주수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경주마를 들이는게 어떤 일인지,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고 그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책임감 있는 주인의 태도, 결정이란 무엇인지 배워야 한다.죽어라 애만 볶아댄다. 왜 안뛰니 왜 못뛰니.그런데 어쩌면 진짜 수업이 필요한건 우리 인간 아닐까. 정작 부족한건 주인인데 말만 원망을 듣고 말만 괴롭다. 그게 델피니일까.
장수에서 올라오는 길에 오래된 단골집에 남편과 저녁을 먹으러 들어갔다.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맥주를 홀짝이며 피니 이야기를 하다가, 축 처져 있는 날 보며 남편이 이런다, "피니에게 믿음을 조금 더 줘봐. 피니 그정도 받을 자격은 있는 애야."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나는 대체 무슨 인간인가.어리다며, 아직 너무 애기라며 말로는 그러면서도 늦었다고, 다 컸다고 속으로는 애를 벼랑으로 몰아가고 있었던걸까.시작도 하기 전에 끝을 걱정하는 지금의 태도는 합리적 준비인가 근거 없는 비관인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우리 말이 그정도 믿음은 받을 자격 있으니까.남들이 뭐라든 우리만은 믿어야 되는거니까.단지 나는, 피니가 "그렇고 그런" "수많은" 경주마 중 하나로 이름도 뭣도 없이 쓸려내려가 잊혀지는게 무섭다. 피니가 아무리 귀여워도, 아무리 빗질을 잘 참고 당근을 맛있게 먹어도 경주마는 그저 잘 달리는게 최고니까. 주로에 나서지조차 못하는 말을 관심갖고 좋아할 사람은 없을테니까. 하찮은 말, 가치도 없는 말 취급을 당할게 너무 속이 상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나는 믿기로 했다. 더 견고하게. 더 열심히.
그리고 적응하기로 했다. "아무 일도 없는" 피니에게.
이번주에도, 다음주에도, 그다음 주에도 아무런 특별한 것도 안하고 이렇다 할 변화도 보이지 않는 휴양마 델피니를 나는 그래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