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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마남녀 Jul 04. 2024

1: 525,600

馬主授業: 경주마 델피니



525,600은 일 년(年)을 분(分)으로 환산한 숫자다. 그러므로 일 년이라고 하면 오십이만 오천육백 분인 셈이다.


우리 경주마 델피니가 오늘 데뷔했다. 암말 열두 마리가 미터를 달리는, 아침 아홉 시에 치러지는 제1경주에 번호표 10번을 달고 나섰다. 1,000미터를 뛰는 데 약 1 분이 걸린다. 피니가 그 1 분을 뛰기까지 1 년이 걸렸다. 그야말로 "1분을 위한 525600분"이다.


​피니의 데뷔전이 확정된 후 남편은 꽤나 진지하게 경쟁마들을 살펴봤더랬다. 소위 "센 아이", 그냥저냥인 아이 등 피니를 제외한 열한 마리를 훑어보고 각 아이들의 직전 성적이나 기록 등을 토대로 누가 우리 피니의 위협적인 상대가 될 것인지 따져보곤 했다.


​경주가 하루이틀 앞으로 다가올 즈음엔 피니가 나서는 제1경주에 대한 경마 예상가들의 예측을 들어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서너 듣다 보니 공통적으로 꼽는 말이 있다. 보통 1번 말을 언급하고 12번 말을 언급하고 그다음에 대충 한  마리 간단히 찍어주는 식이었는데, 보너스로 말해주는 그 한  마리도 듣다 보니 거의 비슷비슷했다. 문제는, 한 사람도 "델피니"라는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는 거다.


각종 예상들을 다 들은 후 자려고 누워 깨달았다: 언급된 말보다, 언급되지 않은 말의 숫자가 훨씬 많다. 열두 마리나 달리는데 이름이라도 한 번씩 불린 말은 겨우 두 마리, 많아야 네 마리. 나머지 여덟 마리는 이름은커녕 숫자로도 불리지 않았다. 그 아이들은 투명했다. 그냥 우르르 뛰는 말들, 말하자면 "들러리" 정도로 뭉뚱그려졌다. 어쩌면 뭉뚱그려지지조차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저 출전표에 흩뿌려진 활자였다가 그마저도 경주의 종료와 함께 사라졌달까.



경마의 감동이란 어디서 오는가. 

전설적인 "명마"의 바람을 가르는 질주? 2위마를 압도적으로 따돌리며 앞서 나가는 "우월함"?   배로 "터지는" 배당? 십만 원을 걸었다가 천만 원으로 되돌려 받을 기대 혹은 그 기대의 실현?


​1분을 달리기 위해 525,600분을 살아온 말의 이야기는 어떤가.



코로나의 여파로 경마장에 쉬이 들어갈 수 없는 들이다. 마주 본인인 남편도 자기 말 뛰는 날에나 겨우 예약을 잡아 들어가는 실정이니 나는 어림도 없다. 피니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젠지 기억도 희미하다. 9시 경주를 보려고 남편은 6시 45분에 집을 나섰다. 애는 뛴다는데 나만 혼자 덩그러니 집에 있기가 심란해서 아침부터 몸을 바삐 움직였다. 연락이 다. 끝났단다. 


"무사히 달려서 들어왔다" 첫마디였다. 일단 됐다, 뛰기만 하면 다리가 아팠던 아인데 그게 아니라니 됐다. 마음이 확 놓였다. 다른 부차적이다. 몇 등이냐고 물어봤는데 대답이 시원치 않은 게 묘하다. 등수에 연연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결과가 좋았으면 신이 나서 진즉 말을 해줬을 터. 성적은 썩 좋지 않은가 보다, 예상을 하며 설마 우리 피니 꼴찌 했냐고 물어봤다. 꼴찌 아니란다. 그럼 꼴찌에서 두 번째냐고 물었다. 그렇단다.


​​여기서 나는 웃음이 터졌다. 웃음의 정체는 "역시 내 새끼 답군, 날 실망시키지 않는군!" 하는 심정? 지금껏 뒤에서 2등보다는 앞에서 2등에 더 친한 삶을 살아온 사람으로서 보란 듯이 꼴찌 언저리를 한 자식새끼를 통해 "역시 애들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삶의 진리를 제대로 배운 것에 대한 웃음이기도 했고, 내 새끼가 특별하고 무척 대단해 보여도 객관적으로는 그저 "애송이 경주마"일 뿐이라는 냉정한 현실을 직시한 것에 대한 웃음이랄까. 주위 사람들에게 깔깔거리며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저희 말이 오늘 데뷔했는데 뒤에서 2등 했대요! 이 얼마나 웃기고 귀엽나요!" 부끄러울 것도 없고, 자존심 상할 것은 더더욱 없었다.


​점심 즈음 남편을 만났다. 경주 영상이 떴다기에 얼른 틀어달라고 했다. 출발 직전, 발주대에 열두 마리 들이 다 들어간 채로 대기하고 있는 게 첫 장면이었다. 10번 게이트를 찾았다, 여닫이 방식의 철문 너머에 피니가 있겠지. 얼굴은 볼 수 없지만 아래쪽으로 흰 양말을 예쁘게 신은 채 가만히 서 있는 피니의 앞다리가 보였다. 피니네 피니야! 완전한 고요 속에 몇 초가 흐르고, 게이트가 확 열린 순간 나는 봤다, 달려 나오는 피니의 얼굴을.





눈물이 핑 돌았다.


피니는 지난 525,600분의 긴 시간을 한 몸에 담고 1분을 달렸다. "말이니까 뛰겠지, 말이란 원래 뛰는 동물이니까"라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단순하고 무지한 관념을 보란 듯이 부수며 진전과 퇴보를 거듭한 지난 년이었기에, 피니가 이 날 주로에서 내디딘 걸음 중 단 하나도 헛되거나 하찮을 수 없었다. 


여기서 나는 경마의 감동을 느꼈다. 우리가 함께 했던 지난 일 년이 달리는 피니의 위로 스쳐가는 걸 느끼며, 그 결과물인 오늘의 피니가 최선을 다해 뛰는 모습을 보며. 성적이나 돈과는 전혀 상관없는, 전혀 다른 차원의 감정이었다. 피니뿐만이 아닐 거다. 모든 말들은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고 과거가 있다. 지금 이 순간 우리의 눈앞에 서기까지의 고유하고 특별한 여정이 모두에게 있다는 거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얼마든 알 수 있고, 그걸 안다는 사실만으로 우린 그 말과 어느 정도 함께 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감동을 공유할 수 있다. 숫자로만 모든 걸 풀어내려고 하면 경마가 건조해진다. 그 건조함 속에 경주마들이 메말라 간다. 반짝반짝 빛이 날 정도로 아름답고 소중한 생명들이 말이다.

그래서 우리 말의 데뷔전은 이렇게 끝이 났다. "델피니"라는 이름이 붙은 이 국산 6등급 암말의 앞 날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매 순간 우리가 함께일 거라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나는 끝없이 감동받을 예정이다.





출주 모습. 노련한 먼로 기수가 잔뜩 긴장한 델피니를 다독이며 경주로에 입장하고 있다.




2021.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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