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 덩어리 인간이 빚어낸 비극과 희극
영국 문학에는 작품성과 상업성을 모두 갖춘 대문호들이 유독 많다. 그들의 작품은 전 세계 어디서든 연극, 영화 그리고 OTT 서비스로 쉽게 만날 수 있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조롱하며 진실을 쥔 독설가 <조나단 스위프트>, 자본의 어둠 위에 연민과 정의를 각인한 휴머니스트 <찰스 디킨스>, 신화를 창조한 언어의 대장장이 <JRR 톨킨>, 진실이 금기일 때 글쓰기를 저항으로 만든 예언자 <조지 오웰>, 언어의 칼로 세상의 위선을 해부한 이단자 <조지 버나드 쇼>, 논리와 무의미가 춤추는 꿈의 수학자 <루이스 캐럴>, 마법을 빌려 현실의 어둠을 꿰뚫은 이야기꾼 <JK 롤링>. 영국 문화가 갖는 힘의 원천이 아닐까 싶다.
음.. JRR 톨킨. 말해 뭐 하겠는가? 최애 작가다. 그는 문학에서 세계관 창조와 영웅적 서사라는 기본 뼈대를 만들어 낸 현대 판타지 소설의 조상이라 할 수 있다. <호빗>과 <반지의 제왕>은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번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영국 문학의 시조새는 따로 있다. JRR 톨킨도 그의 영향 아래에 있다. 작가 스스로 언어가 세계를 만든다는 신념을 그로부터 물려받았다고 말했다. 오늘 소개할 "윌리엄 셰익스피어", 인간 존재의 심연을 무대로 끌어올린 언어의 연금술사다. 수많은 영국 문학작품들의 본류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반드시 만나는 인물이다.
셰익스피어가 그려내는 작품 세계는 감정의 지도와 같다. 인간 원형에 대한 작가의 통찰은 창조가 아닌 조망이다. 그는 모순 속에서 꿈틀대는 인간의 욕망이 펼치는 이중성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리고 시적 언어를 통해 상상을 현실로 구현해 낸다. 그가 만든 감정의 지도를 현대의 독자들은 비극과 희극이라 부른다. 그의 지도를 따라가다 보면 감정이 우리를 어떻게 무너뜨리고, 또 어떻게 우리를 다시 연결시키는지를 통찰하게 된다.
“인간이 빚어낸 욕망과 비극, 사랑과 권력, 광기와 유머가 끝없이 충돌하는 거대한 무대, 그리고 그 무대 위에서 우리는 모두 언젠가 한 번쯤 주인공이 된다.”
망설임 속에서 복수의 칼을 들지만 고뇌 끝에서 자기를 파괴하는 생각의 망령 "햄릿", 사랑을 믿지만 의심이라는 독에 영혼을 잃어버린 장군 "오셀로", 자비의 얼굴을 쓴 지성으로 세상을 속이고 구원하는 은밀한 정의 "포샤", 새벽을 기다리며 사랑을 맹세하지만 죽음으로 피어난 순결한 열정 "줄리엣". 작가는 인간 원형을 파헤쳐 작품 속 인물들에게 부여했기에 지금의 우리와 다르지 않다. 그의 작품이 400년이 지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이유다.
여느 고전이 그러하듯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언제 어느 때 읽느냐에 따라 달리 읽힌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도 위로도 모두 그의 작품에서 찾을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대학교 교양수업에서 "햄릿" 원문을 강독하면서 처음 접했다. 그 유명한 <제3막 제1장>에서 햄릿이 읊조리는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부분도 그때 처음 읽었다.
시간이 흘러 범우사가 펴낸 셰익스피어 작품집을 사서 읽었다. <햄릿>, <리어왕>, <오셀로> 그리고 <맥베스>를 모은 4대 비극. <베니스의 상인>, <한여름밤의 꿈>, <당신이 좋으실 대로> 그리고 <로미오와 줄리엣>을 모은 4대 희극. 인간의 심연을 그처럼 통찰한 작가가 또 있을까 싶었다.
셰익스피어 비극을 살펴보자. 인간의 의식이 너무 밝을 때 생기는 비극 <햄릿>, 인간이 질투에 휩쓸려 사랑했던 사람도 의심할 때 생기는 비극 <오셀로>, 인간이 권력을 향한 욕망으로 경계를 넘을 때 생기는 비극 <맥베스>, 인간이 깊은 외로움으로 인해 사랑을 오해할 때 생기는 비극 <리어 왕>. 네 작품 모두 인간이 내면의 감정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할 때 벌어지는 자기 파괴를 보여준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적어도 한 번쯤은 겪게 되는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고통들이다. 자기가 파괴되고서야 비로소 진실을 깨닫게 되는 인간의 모순과 어리석음에 대한 통찰이다. 분명한 것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고 나면 절대 그 전과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2016년 영국 배우 베네딕트 컴버비치가 연기한 <햄릿 Hamlet> 공연실황을 OTT 서비스에서 만날 수 있다. 꼭 한번 찾아서 감상해 볼 것을 권한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흔히 ‘복수 비극’이라 불리지만, 그 실체는 훨씬 더 복잡하고 깊다. 복잡한 인간 내면을 그리지만 훤히 들여다 보이기에 더 깊게 느껴진다. 햄릿이라는 인물을 통해 인간이 감정 속에서 어떻게 무너지고, 그 무너짐이 어떻게 타인을 파괴하며, 결국 공동체 전체를 어떻게 허물어뜨리는가를 보여주는 감정 해체의 지도다.
햄릿은 고뇌하는 영웅보다 찌질한 인간 전형에 가깝다. 삼촌 클로디어스를 죽여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자기도 그와 비슷한 살인자가 되어 신의 구원을 받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도 있다. 아버지에 대한 복수가 뭔가 큰 대의가 있는 것처럼 윤리적으로 포장한다. 하지만 자신이 처해질 상황을 계속 계산하면서 주저한다. 클로디어스에 대한 복수로 인해 전개될 폭풍의 무게를 감당할 자신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끊임없이 뭔가 이유를 찾아 복수의 순간을 유예하고 회피한다.
햄릿이 어머니 거트루드에게 보이는 분노는 도덕적 실망이라기보다 정서적 소유가 파괴된 데 대한 유아적 절망에 가깝다. 어머니가 다른 남성과 결혼을 했다는 사실을 도덕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의 분노는 윤리의 언어를 입고 있지만, 실은 ‘왜 내 것이 아니냐’는 고통에 다름 아니다. 햄릿은 모순된 사랑과 증오를 동시에 품고서 자기감정에 빠져 살아가는 ‘성장하지 못한 어른 아이’와 같다.
“나는 믿었던 것을 의심하게 되었고, 내가 품었던 감정이 나를 삼켜버렸고, 그래서 나는 파괴되었지만, 그 순간에야 나는 나 자신을 본다.”
이렇듯 햄릿은 단순한 복수극이 아니라, 성숙하지 못한 인간의 내면이 만들어내는 감정의 파열음이다. 햄릿을 포함해 수많은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읽고 나면 그가 400년이 지난 지금 내게 이렇게 말하는 듯싶다.
감정을 다루는 방식이 곧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
함께 읽을 책;
-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이태주 옮김, 범우사
- "셰익스피어 4대 희극", 이태주 옮김, 범우사
- "셰익스피어 4대 사극", 이태주 옮김, 범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