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 오스카'를 아시나요?

시詩, 언어의 가장 순수한 형태

by 읽는 인간

나는 지금도 하모니카를 좋아한다. 특유의 음색에서 배어나는 서정적 느낌이 좋다. 대학시절 하모니카를 제법 불던 선배의 영향으로 잠깐 입에 물어본 적도 있다. 학교 앞 조그만 악기점에서 하모니카를 구매하고 사장님께 몇 차례 레슨을 받았다. 하지만 음치에 가까운 내 리듬감 때문에 오래지 않아 서로 합의에 이르렀다. 가르치는 사장님도 힘들고 배우는 나도 힘들어 중간에 포기했던 것이다. 이번 생에서 하모니카는 그냥 듣는 것으로 정리했다.


하모니카 하면 <리 오스카 Lee Oscar>를 빼놓을 수 없다. 명곡이 많지만 1981년 발매된 3집 앨범 <My Road Our Road>의 타이틀 곡 <My Road>가 가장 좋다. 리 오스카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조용히, 하지만 단단하게 들려주는 듯한 느낌 때문이다. 군더더기 없이 맑은 하모니카 소리, 거기에 담긴 외로움, 희망, 집념 같은 것들이 하모니카 선율에 녹아있다. 리 오스카는 말로 하지 않고, 선율로 인생을 말하는 사람 같다.


대학교 1학년 때로 기억된다. 대학 진학으로 고향을 떠나 새로운 도시에 터를 잡았다. 신입생의 설렘도 잠시, 분주한 도시와 사람들 그리고 슴슴한 음식들, 내가 쓰는 언어들까지 모든 게 낯설게 느껴졌다. 어쩌다 나와 같은 억양의 동기를 만나면 반가울 지경이었다. 그리고 처음 느껴본 감정, "쓸쓸함"을 마주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자취생활 함께한 '외로움'과는 다른 느낌의 감정이었다. 기숙사에 홀로 앉아 창밖을 바라볼 때면 가끔씩 그 "쓸쓸함"이 찾아왔다. 그때마다 친구와 함께했던 정서적 경험이 오히려 나를 풍성하게 해 주었다. 맥주 한 병, 시집 한 권, 그리고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는 하모니카 선율.


비 내리는 저녁 기숙사에 앉아 창밖 오렌지빛 가로등을 바라보며 리 오스카의 <My Road>를 듣는 시간은 행복 그 자체였다. 어느 날은 고등학교 시절 토요일 오후 부모님 집으로 향하며 걷던 시골길이 떠올랐다. 논밭 끝자락에 내려앉아 고즈넉이 물든 저녁노을을 넋 놓고 쳐다보던 그 길. 내 눈에 담긴 가장 예쁜 풍경화다. 그리고 부지런한 농부가 논둑을 태울 때면 자욱이 퍼져 앉은 쿰쿰한 연기. 내 후각이 기억하는 최고의 향기다. 그렇게 리 오스카의 선율과 함께 시골길 풍경은 내 마음속 오래된 풍경화가 되었다.


리 오스카의 하모니카 선율과 함께했던 친구, 시집詩集. 출판 연도는 확실치 않지만 박인희 시인이 발표한 하얀색 표지의 시집으로 기억된다. 그중 <얼굴>이라는 시를 가장 좋아했다.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로 시작하고 또 끝을 맺는다. 박인희 시인이 여중생 시절 단짝이었던 이해인 수녀를 그리워하며 쓴 시다. 지금 꺼내봐도 비 오는 날 리 오스카의 하모니카 선율에 가장 잘 어울린다.


누구나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도 기억이 또렷해 문득 중얼거리게 되는 시가 하나쯤 있다. 몇 마디 언어로 감정의 우주를 담아내는 그릇, 시詩. 박인희 시인의 <얼굴>이 내겐 그렇다.


시는 책 속 활자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좋은 시는 가수들이 곡을 붙여 음악과 함께 새로운 생명력을 얻는다. 익히 알듯, 박인희 시인도 유명한 싱어송 라이터고, 밥 딜런은 대중가요 뮤지션이면서 201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안치환 씨의 <인생은 나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라는 노래가 참 좋다. 살면서 씁쓸한 일을 겪고 마음에 생채기가 생길 때가 있다. 그럴 때 가사를 흥얼거리다 보면 가슴속 답답한 그 무엇이 녹아내리는 위안을 받는다. 사실 이 노래는 정호승 시인의 동명 시에 안치환 씨가 곡을 붙인 거다. 좋은 시는 상처 난 마음에 붙이는 반창고와 같다.


아주 오래전, 대학원 실험실 생활에 지칠 때면 동기 녀석과 늦은 밤 기숙사에서 넋두리를 나눴다. 어김없이 서로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버드와이저 맥주를 마셨다. 친구는 퀸 Queen 음반을 나는 리 오스카를 좋아했다. 불안한 진로를 고민하며 서로를 다독였던 시간들은 그야말로 몇 마디 말로 정리되지 않는 복잡한 감정 덩어리였다. 그때 친구와 이런 얘길 나눴다. "시간이 꽤 흘러 우리가 이 음악을 다시 듣는다면 어떤 느낌일까?" 시간이 많이 흘렀다. 속절없이. 아파트 거실 너머 오렌지빛 가로등을 바라보며 리 오스카를 듣는다. 그리고 그 시절 친구에게 나지막이 말한다.

"계속 잘 가고 있어. 우리 길은 틀리지 않았어."

keyword
이전 10화"도련님", 나쓰메 소세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