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

결핍과 허상이 만든 고통

by 읽는 인간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아포리즘이 유행이다. 교보문고에 가면 쇼펜하우어 관련 서적을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스테디셀러다. 쇼펜하우어는 서양의 철학, 문학 그리고 정신분석에서 큰 흔적을 남긴 만큼 다양한 분야에서 그를 만날 수 있다. 그만큼 서양 철학의 전환점이 된 철학자다.


오늘 소개하는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이성이 지배하던 서양 철학에 고통과 무의식을 밀어 넣은 전환점이 된 작품이다. 이 책에서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 순수한 이성의 산물이 아니라, 맹목적 의지의 투사라는 점을 주장한다. 총 71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방대한 저작은 4권에 걸쳐 인간 존재, 예술, 윤리, 금욕, 구원까지의 사유를 풀어놓는다.


일단 어렵다. 내용은 둘째 치고,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이래로 가독성을 가장 심각하게 위협했다. 문장은 어찌나 길고, 내용은 또 얼마나 현학적이던지. 집중력을 유지하고 몇 줄을 따라가려 해도, 곧장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게다가 끝까지 읽어도 머릿속에 남는 게 별로 없다. 니체, 프로이트, 융, 그리고 아인슈타인 모두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고 감명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하니 이해해 보려 여러 번 시도했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로 이 작품의 해설서를 읽게 되었다. 접근 방식이 신선했다. 철학서가 아닌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읽어보라는 것이다. 더불어 쇼펜하우어가 불전 <법구경>의 영향을 받았다 하니, 불교 교리도 얹혀보길 권했다. 마침 유럽 출장이 잡혀 두꺼운 책(을유문화사, 홍성광 옮김)을 가방에 넣어두고 틈틈이 읽었다.


“세계는 욕망이 만든 허상이고, 삶은 갈증이라는 이름의 고통이다.”


작품을 읽고 난 후 메모장에 적었다. 이 작품이 왜 위대한 고전으로 불리며 침대 머리맡에 둬야 하는지 알것 같았다. 쇼펜하우어는 작품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을 통찰하고, 삶의 고통으로부터 진정 자유로워지는 길을 제시한다. 작품 속 핵심 문장 7개를 이정표 삼아 그 길을 따라가 보자.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인식의 기반을 뒤흔든다. 세계는 개인의 경험적 실재이지 객관의 초월적 관념이 아니다. 개인이 오감을 통해 주관적으로 경험한 것이라 선언한다. 실재하는 세계는 개인의 인식이 투사된 허상(꿈에 나타나는 괴물)인 것이다.


“의지는 삶의 본질이며, 이성은 그것의 도구에 불과하다.”

인식의 주체를 들여다본다. 인간 존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이성이라 믿었던 사고는 모두 허상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행동은 이성보다는 맹목적이고 본능적인 의지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이 개념을 확장하여 ‘무의식’을 만들어냈다.


“욕망은 충족되지 않으면 고통이고, 충족되면 권태다.”

인간의 삶은 욕망이라는 의지가 만들어내는 반복된 패턴이다. 끊임없이 욕망을 충족하려 하지만 그 결과는 고통과 권태의 반복이다. 결국, 삶은 고통과 권태라는 이중 감옥 안에서 계속 반복된다.


“행복이란 고통의 일시적 부재일 뿐이다.”

우리에게 직접 주어지는 것은 결핍과 고통뿐이다. 따라서 근원적인 행복은 없으며, 욕망이 충족되어 고통이 멈춘 상태를 인간은 ‘행복’이라고 착각한다. 결국,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은 환상일 뿐이라고 현실을 냉정하게 인식한다.


“개체적 자아는 의지의 환영이다.”

‘나’라는 존재를 정의하는 자아라는 것도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의지가 만들어낸 일시적 표상일 뿐이다.


“예술은 의지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순간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의지가 만들어낸 허상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고통과 권태만을 반복할 것인가. 작가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예술을 감상하거나 창조할 때, 인간은 잠시 욕망과 고통에서 벗어난 상태에 들어간다. 몰입과 창조의 순간을 통해 의지를 벗어난 순수한 인식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의지를 부정하는 자만이 진정 자유롭다.”

진정한 자유는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욕망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얻어진다. 욕망의 부정은 욕망을 없애는 것을 넘어서 욕망하지 않음으로써 얻어진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의 자유’가 아닐까 싶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단지 이론이 아니라 삶을 보는 또 하나의 눈이다. 흔히 그를 삶을 부정하는 염세주의자로 오해한다. 하지만 그는 철저하게 삶을 직시했기에 막연한 허상 가득한 긍정보다 고통을 이해하고 초월하려 했을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삶을 부정하고 싫어한 철학자가 아니라, 고통을 철학으로 구제하려 한 철학자였다.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고 나면, 불교과 참 많이 닮아있다 생각이 든다. 불교는 탐貪진嗔치癡 삼독三毒을 소멸시키면 깨달음에 이른다 했다. 받으려는 마음을 탐貪이라 하고, 받으려는 마음이 채워지지 않아 성내는 것을 진嗔이라 하고, 받으려 성내는 마음을 자각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치癡라 한다. 그러니 깨달음이 별게 아니고 받으려는 마음을 내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이 작품에서 말하는 의지를 부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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